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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곰 Sep 29. 2024

가난과 불안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법(3)

2장 : 다시 찾은 가족, 그리고 낯선 기억

기억력이 좋다는 건 생각만큼 행복한 일이 아닐 때가 많다. 나는 5살 무렵의 외가에서 살았던 기억을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작은 방 안의 옛날 책들, 부엌을 가득 채운 쌀가마니 냄새,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한가롭게 들판을 가로지르던 작은 개의 모습까지도. 그 기억을 어머님께 이야기할 때마다 어머님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곤 하셨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보는 것처럼. 그 눈빛 속엔 미안함과 슬픔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어린 나로선 그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그 기억들이 어머님에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갔는지는 어린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6살이 지나던 해, 부모님은 마침내 나를 다시 데려가셨다. 외가에서의 삶이 익숙했던 나에게는 부모님 집으로의 복귀가 또 하나의 이사처럼 느껴졌다. 나의 시간이 흘렀던 것처럼 부모님의 시간도 많이 흘렀고,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부모님은 작은 항구 마을에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었다. 그곳은 부모님이 마련한 새로운 터전, 시장통의 작은 가게가 딸려 있는 단칸방이었다. 처음 그 집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사를 겪게 될지 그 당시에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에 신기해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던 낯선 한 아이에 온 신경을 집중을 했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부모님의 손을 꼭 잡고 그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방 한구석에 앉아 있던 아이, 나와 똑같이 생긴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지? 그저 또래의 낯선 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그 아이를 소개하며 말했다. “네 동생이야.”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놀랍게도 나는 쌍둥이였다. 그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지만, 무엇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그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던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부모님도 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나를 외가로 보내는 결정을 하였을 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정이 있었을지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왜 우리는 함께 하지 못했던 걸까? 왜 나만 외가에 보내졌을까? 이런 물음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나는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막상 동생과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혼자라고 느낀 시간 동안, 그 아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였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치 오랜 시간을 걸쳐 재회한 가족처럼 서로를 서서히 알아갔다.


처음엔 모든 것이 어색했다. 동생도, 부모님도. 처음으로 마주한 부모님의 관심조차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느 순간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외가에서 친척들로부터 받았던 애정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 관심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불편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낯선 감정들이 천천히 따뜻한 무언가로 변해갔다.


특히, 동생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았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서툴게 탐색하고, 낯설고 어색하게 마주 앉아 눈을 맞추던 시간들. 그러나 그저 잠시 낯선 것이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 같은 방 안에서 자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어머님이 가게로 나가신 후 집을 지키며 서로의 존재를 점점 더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동생과 얘기하던 도중에 자연스럽게 그 애의 손을 잡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친구처럼 말이다.


우리가 함께하던 시간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가족의 온기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던 그때, 나는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함께 있는 것이 외롭지 않다는 것, 그것이 내가 그때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부모님은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셨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직장에 계셨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건어물을 파셨다. 부모님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우리의 식탁에 부족함이 없도록 늘 최선을 다하셨다. 단칸방이라는 좁디좁은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처음으로 한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함이 넘쳤다.


그리고 나는 그 작은 방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전엔 느껴보지 못한 감정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더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외로운 순간이 많았고, 가난과 불안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동생과 함께라면, 부모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현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이사와 변화가 있었지만, 그 단칸방에서 동생의 손을 잡고 잠들던 그 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 진짜 가족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단칸방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따뜻한 집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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