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뭐 큰 거 바라나요. 서로 존중하고 지킬 거 지키자는 건데요.
학교 구강 검진 기간이어서 토요일 오전은 무척 바쁘다. 정확히는 예약표만 바쁜 것 같다. 학교 검진은 시간이 얼마 안 걸리니까 편한 시간에 내원해서 잠깐만 기다리면 중간중간에 끼워서 보겠다고 안내를 하는 편인데, 대기하기 싫으니까 예약을 해달라고 해놓고 안 오거나, 학교 검진이니까 본인이 예약한 시간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에 예약 환자분 몇 명이 진료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한 학생과 보호자가 들어왔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냐는 직원의 질문에 보호자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애 학교 구강 검진."이라고 답을 했다. 진료실 안에서 직원과 보호자의 대화가 들으면서 이상하기는 했지만, 보호자가 전화 통화 중이어서 답을 저렇게 했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보호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내 큰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고, 전화통화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당근마켓 채팅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당근, 당근"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사실 요즘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고 있었다. 빨리 구강검진을 하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른 환자분들 치료 시간 사이에 학생을 끼워서 검진을 했다. 치료가 필요한 부분을 알려주고 치료 진행을 원하면 약속을 잡거나 당일 진료를 원하면 대기했다가 치료를 받고 가도록 안내했다. 처음에 치료하고 간다고 했던 보호자가 비용 설명을 듣더니 그냥 간다고 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여기저기에 전화를 한다. 구강검진 서류를 챙겨서 주고 보내려는데 이번에는 다시 치료를 받고 간다고 한다. 대기가 좀 길어질 수 있다고 안내를 하니 기다리겠단다. 그러고 나니 그때부터는 엄마는 치료를 받고 가라, 아이는 안 받겠다 하면서 대기실 안에서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대기 환자분들에게 방해가 되어서 조용히 계실 것을 요청했으나 듣는 척도 안 한다. 좁은 점빵 특성상 진료실까지 그 대화가 들리니 도무지 진료에 집중이 안된다.
아이가 이긴 건지,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이와 엄마는 치료를 받지 않고 요란하게 나갔다. 바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직원이 말한다.
"저 학생이랑 보호자분 지난번에는 예약해 놓고서 전화도 안 받고 오지도 않았고요, 오늘도 11시 반 예약이었는데 아침에 전화해서 예약시간도 확인해 놓고는 그 시간에 온 거예요. 아침에 전화할 때도 너무 무례했는데 병원 와서도 저러네요"
아침에 전화할 때는 뭐라고 했는지 물으니 대답이 정말 가관이다.
직원 : 감사합니다, 뿅 원장 치과입니다.
보호자 : 홍 OO
직원 : 네? 뿅 원장 치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보호자 : 홍 OO, 예약
직원 : (멘붕에 빠졌지만) 네, 오늘 예약되어 있으니 예약 시간에 오시면 됩니다.
보호자 : 몇 시?
직원 : (여전히 멘붕에 빠졌지만 참으면서) 11시 반입니다.
보호자 : (답 없이 전화 끊음. 뚝.)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다. 입장을 바꿔서 학생 보호자 본인이 전화통화를 하면서 저렇게 답을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묻고 싶다.
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우리 치과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인식이 좋으니 구강검진을 해달라는 보건교사들의 요청으로 검진을 시작했고, 그동안 만난 대부분은 좋은 학부모, 귀여운 학생들이었다. 좋은 관계, 좋은 치료로 이어지는 선순환도 많았던지라 즐겁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즘 부쩍 늘어난 이런 일들은 사람을 무너지게 만든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서 학교 구강 검진을 하려는 치과들이 많아졌다던데 나는 내년에도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치과의사 생활 15년, 어지간한 건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정말 멘붕에 빠지는 일들이 너무 많다. 꼭 우리 치과에서 치료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서로 지킬 것은 지키고 존중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것마저도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이런 일은 웃어넘길 때도 되었는데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걸 보면 그만큼 단단해 지기에는 나 역시도 아직 멀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