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아빠는 팔불출, 딸바보가 된다.
중간고사를 생각보다 잘 못 보았던 큰 아이는 기말고사를 한 달 전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시험범위 학습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 나나 아내는 굳이 이렇게 일찍 시작할 필요가 있겠냐는 말로 아이를 달랬다. 우리 생각에는 2주일이면 충분할 양이었고, 그것 때문에 한 달 전부터 주말에도 학원을 가거나 가족 모임에서 빠지는 것은 오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결심은 대단했고, 결의는 단호했다. 주말에 간 가족여행에서 첫날 저녁은 혼자서 카페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했고,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도 차 안에서 엄마를 달달 볶으면서 기술 가정과 같은 암기과목을 외우고 있었다. 암기과목을 왜 시험 3~4주 전부터 저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이가 애를 쓰고 있으니 아이엄마는 (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도와주고 있었다. 저렇게 외우는데도 다음 날이 되면 까먹는 걸 보고 가끔씩은 돌머리(돌대가리?)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동 거리가 있는 학원에 다니다 보니 어차피 자습하러 가는 거면 그냥 집에서 하라는 말을 했지만, 집에서는 공부가 안된다면서 아이는 주말에도 학원으로 향했다. 나는 딸아이가 시간 아깝고 피곤하게 무거운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한다고 속상해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아이가 토요일, 일요일에 학원 세 군데를 돌거나, 늦은 시간까지 스터디 카페를 들락날락하는 것을 비롯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부시간 배분과 온갖 짜증, 진상짓을 하는 것에 나는 질리고 지쳐가고 있었다. 꼴 보기 싫은 아이의 모습에 한 번씩 뻥 터질 것 같을 때에는 스스로 자리를 피하거나, 아이 눈치를 보면서 부디 이 시험기간이 빨리 끝나기를 아이보다 더 고대하고 있었다. '아이고... 저 지랄을 했는데 원하는 만큼 시험 성적이 안 나오면 너나 나나 참 힘들일이다...'라는 마음이었다.
3일간 여덟 과목의 시험 기간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하루하루 시험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해서 오늘 시험은 잘 봤네, 망했네 하면서 하소연을 했다. 그저 빨리 이 기간이 지났으면 하는 나의 입장에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오늘 시험은 끝났으니 잘 봤던 못 봤던 빨리 잊어버리고 내일 시험 준비해라, 수고했다'는 것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시험을 치렀던 나였기에 지나간 시험을 마음에 담고 있어 봐야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공부하던 딸아이의 시험이 끝났다. 객관식 시험이 주였던 우리 때와는 달리, 서술형과 서답형 문제가 대부분인 요즘시험에서는 채점 결과에 대해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감점 이유를 설명해 주고 본인이 납득을 해야 결과가 확정된단다. 마침내 아이의 시험 결과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대부분의 과목에서 놀랄 만큼 좋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이번에 많은 아이들이 어려워했다는 수학에서는 반에서 유일하게 100점을 맞았다며 기뻐했다.
수고했다고, 그렇게 열심해했으니 좋은 결과도 나왔다고 마음껏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걱정이 많은 나는 기쁨과 동시에 또 다른 걱정을 시작했다. '혹시 아이가 이번 결과에 자만해서 다음번에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어쩌나...'부터 시작해서 '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어서 한 달 반 전부터 시험 준비를 시작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끝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고맙고 기쁘다. 공부를 잘해준 것도 당연히 고맙지만 늘 성실하고 꾸준히 노력했던 딸아이가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성취하는 기쁨을 알아낸 것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낸 것이 자랑스럽다.
문득 딸바보를 넘어선 딸등신이라고 불렸던 옛날이 생각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팔불출, 고슴도치 아빠다. 하지만 이런 걱정, 기쁨이라면 계속 딸등신으로 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