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평화롭기를.
개원의 생활을 한지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사람 얼굴과 눈빛만 봐도, 한 마디만 나눠봐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 느낌이 온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환자인지 아닌지를 금방 판단하게 된다.
어제 온 초등학생 아이가 그랬다. 아이 부모의 말에 따르면 몇 달 전에 학교 구강 검진을 했었는데, 이제야 치료를 하고 싶단다. 다만 그때 무슨 치료를 해야 한다고 들었는지는 잘 모른단다. 우선 검진을 하고 필요한 치료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아이의 반응이 벌써 쉽지 않다. 아무래도 내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아이인 것 같았다. 내가 옆자리에서 다른 환자 진료를 보는 중이어서, 위생사가 아이를 체어에 먼저 앉혀놓고 준비만 했는데, 앉자마자 주변에 있는 기구나 타구대 같은 곳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들어 올려보며 "아파요? 이거 뭐 하는 거예요? 이제 뭐 할 거예요? 아픈 거죠?"라며 쉼 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위생사가 주의를 주고 잠깐 기다릴 것을 말했지만 멈추지 않는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환자도 눈살을 찌푸리는 게 느껴진다.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냐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벌써부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내가 가서 의자를 뒤로 눕히고 입안을 보려고 하지만, 아이는 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부림을 치고 울기 시작한다. 그냥 의자를 뒤로 눕히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를 달래어 가까스로 입안을 봤지만 보는 내내 말하고, 울고, 소리를 지른다. 검진 기구를 씹거나 갑자기 움직여서 다칠까 조마조마하며 확인해 보니 특별한 이상은 없고, 치아 홈메우기 같은 예방치료면 될 것 같다. 아이의 성향상 우리 치과에서 진행이 힘들 것 같았지만 부모는 오늘 치료를 받고 가겠다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치료 진행이 어려울 것 같지만 무작정 안된다고 하면 요즘 같은 시대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소아치과가 아니기에 페디랩과 같은 아이의 움직임을 보정할 기구가 없고, 혹시라도 치료하다가 날카로운 기구에 아이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치료를 시도해 보겠지만 거부가 심하면 어려울 수 있겠다고 말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입을 벌리는데만 한참이 걸렸다. 한 개의 치아를 간신히 세척만 했지만 울고, 발길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 아이의 거부가 너무 심해 도저히 치료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우리 직원이 다치거나 장비가 파손될 수도 있겠다 싶어 부모를 불러 진행이 어려움을 알리고 귀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부모가 들어오자 아이의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다른 환자들이 있는데도 소리를 지르고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의 반응도 만만치 않다. '네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늘 꼭 안 해도 된다. 다음에 다시 하면 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아이는 체어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이번에는 '치료받고 갈 거야'를 외치기 시작한다. 옆자리나 대기실에 있는 다른 환자분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우리 병원 식구들은 이런 게 익숙해서 별로 타격받지 않는다). 그나마 부모가 보기에도 치료 진행이 어려워 보였는지 아이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가며 등짝을 때린다. 병원 복도로 나간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덩달아 부모도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20분가량을 부모와 초등학생 아이가 싸우다가 들어와 병원 소파에 올려둔 가방을 들고나간다. 기대하지도 않지만 사과 따위는 없다. 그저 저 소란에 시끄러웠을 옆자리 업장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개원의로 보낸 세월과 별의별 환자를 본 경험이 쌓여 이제는 누군가에 대한 어떠한 판단이나 비난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환자인지에 대한 고민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냥 그것조차 무심하게 흘려보낼 뿐이다. 오늘도 평화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