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부자가 참 많구나. 돈은 나만 없는 거 같다.
한 환자분이 오랜만에 오셨다. 2~3년에 한 번 정도 내원하는 분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분은 아니지만 50대의 나이에도 참 깔끔하고 단정한, 어찌 보면 정말 곱게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남자분이다.
불편한 부분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검진을 하는데 환자분 손목 위에 시계가 반짝거렸다.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처럼 시계도 참 깔끔해 보인다고 생각하고 봤는데 시계에 쓰여 있는 글자가 심상치 않다.
PATEK P*******
'오! 저게 말로만 듣는 파텍필립인가? 저거 진짜인가? 저런 시계는 크로노그래프 막 있고 이런 거 아니었어? 저렇게 단순하게 생긴 것도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품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백화점에 가서 매장 근처를 지나가도 진열된 시계의 가격을 보면 주눅부터 들었던지라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어렸을 때 모 시계 브랜드에서 나온 어린 왕자가 그려진 시계를 갖고 싶었던 적이 잠깐 있기는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도 번거롭고, 무엇보다 손목이 아파서 시계를 차기가 힘들었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비싸다는 시계 브랜드를 실물로 처음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도 생겼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내에게 오늘 본 시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얼마인지 여쭤보지 그랬어?"라고 말한다. "에이... 그건 좀 그렇잖아?"라고 말했더니 "그런 거 물어보면 좋아하실걸?!"라고 한다. (스스로도 참 찌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터넷으로 파텍필립 시계 가격을 찾아보니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수천만 원은 기본이고 수억, 수십억, 수백억씩 하는 것도 있다. (그래도 환자분 시계를 찾아보는 극도로 찌질한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살 수 없는 것이기에 갖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환자분 시계가 얼마나 비싼 건지는 계속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음에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연습을 했다. '환자분, 실례지만 제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환자분, 실례지만 개인적인 것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환자분,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등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오늘, 그 환자분이 내원하셨다. 예정된 치료를 끝내고, 주의사항과 불편할 수 있는 사항을 설명한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환자분, 실례지만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니가 나한테 물어볼게 뭐가 있냐는 표정으로 환자분이 나를 바라본다.
"그런 시계는 많이 비싼가요?"라고 질문하니 환자분이 가볍게 웃으면서 "네, 조금..."이라고 답하신다.
"혹시 얼마나 비싼가요.... 제가 파텍필립 찬 분은 처음 봐서요.... 하하...."라고 말하니 환자분이 웃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살짝 이야기해 준다. "팔천 정도..."
직원들은 내가 환자분한테 시계 가격을 물어보는 것을 보고는 웃다가 가격을 듣고 나서는 웃음이 없어졌다. 어지간한 가격이어야 내 손목에 한 번 차보겠다는 말이라도 하지, 떨어뜨릴까 봐 겁나서 말도 못 꺼내겠다. 저분은 손목에 어지간한 수입 중형차 한 대를 차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듣고 나니 온갖 생각이 든다. 돈은 나만 없다는 자괴감과 함께 (어차피 안 사겠지만) 비싼 시계 하나쯤은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갑자기 예전에 홍콩에 여행을 갔을 때, 현지에서 어떤 사람이 다가와 "형님, IWC S급 30만 원."이라고 말할 때 그거라도 샀어야 했나라는 생각마저 드는 날이다. 에잇... 조만간 갤럭시 워치를 하나 사고 화면을 파텍필립으로 해서 기분이라도 내봐야겠다.
참... 직원들 말에 의하면 수납하실 때의 환자분은 참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한다. 역시 아내의 말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