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피사체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연휴로 시작한 10월.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일이 많아 즐거운 10월이었겠지만 자영업자이자 점빵 원장인 나는 너무나 많이 줄어든 근무 일수에 걱정과 좌절로 시작한 10월이었다. 고정 비용은 그대로이지만 일하는 날이 적으면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기도 하고 연휴 앞뒤로 사람들의 소비가 극도로 줄어드는 시기였기에,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는 시간은 많지만 뭔가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는 말라 버리고 있었다.
덕분에 밀려든 우울감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이것저것을 기웃거렸다. 게임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철권 8' 타이틀을 사서 해보기도 했고, 전자책을 몇 권씩 다운로드해서 이것저것 읽어보기도 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줄어든 병원 수익을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 듯이 가격이 올라가는 금 시세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쳐다보기도 했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주식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식창을 계속 보며 마음 졸이기도 했었다. 뭐라도 사면 비어 있는 마음이 채워질 것 같아서 괜히 쿠팡앱을 열어보며 사고 싶은 것이 없는지를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PS5의 컨트롤러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미친 듯이 오르던 금 가격은 날개를 잃은 것처럼 추락했으며,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오던 코스피 지수가 나에게는 가혹하게도 찔끔찔끔 오르기라도 하면 다행인 수익을 남겨 주었다. 여전히 갖고 싶은 것은 없으며, 혹시나 사고 싶은 것이 생각나더라도 가성비를 따지다 보면 굳이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월 중반부터는 조금 바빠져서 억지로라도 일을 하느라 책도, 게임도, 투자도 조금씩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오늘, 갑자기 '이걸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게 있었다. 최근 보기 시작한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 상연이가 사진 동아리 모집 부스에서 "돈 없어도 사진 찍을 수 있어요?"라는 장면이 있다. 그걸 보며 공과대학에 다닐 때의 내가 생각이 났다. 드라마의 배경처럼 한참 SLR 카메라가 유행했던 2000년대 초였다. 1980년대에 사우디에 일하러 가셨던 아버지가 사 온 NIKON FM2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었다. 아버지가 사진을 찍어주실 때는 필름 상자에 쓰여 있는 조리개값과 셔터속도대로 찍기만 했었던 것 같은데,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공부하다 보니 그 원리나 기계적인 부분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좀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 학교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아껴가며 취미생활을 했기에 필름, 현상, 인화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것저것 알기 시작하면서 커져가는 욕심에 비싼 렌즈는 못 사더라도 저렴하면서도 사진이 잘 나오는 삼양광학의 폴라 렌즈 같은 것을 중고로 구하러 다니면서 '돈 없어도 사진을 찍던' 학생 시설이 생각났다.
그때 샀던 카메라 중에 '가난한 자의 라이카'라 불렸던 YASHICA의 35GX가 있었다. RF 방식이라고 했었나... 뷰파인더 안을 자세히 보고 그 안에서 초점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르면 SLR처럼 예쁜 "찰칵"소리가 아닌 금속핀이 튕겨지는 것 같은 허접한 "틱"소리가 나는 카메라였는데 사진의 색감이 특이하게 붉고 강렬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의 여자친구 사진을 찍을 때 빛이 적은 실내에서는 초점을 맞추기 힘들어 필름 한 두 통을 써보고는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결과물이 특별하고 예뻐서 계속 가지고 있었다. 오늘 갑자기 그 카메라 생각이 나면서 집안 구석을 뒤져서 꺼냈다. 늘 물건을 조심스럽게 아껴 쓰는 습관 덕분일까. 싸구려 레자로 된 카메라 케이스는 세월따라 낡고 부스러졌지만 그 안에 카메라는 아주 깨끗했다. 열어 보고 이것저것 눌러보니 안 되는 것 없이 다 잘 작동했다. 배터리가 오래되어 방전되었지만 누액도 없었고 사진을 찍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당분간은 이 카메라로 사진을 좀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에 필름을 주문했다. 이제는 큰 마음을 먹으면 라이카를 살 수 있는 여유가 있고 DSLR이나 미러리스 카메라도 가지고 있지만, 사진을 처음 배우면서 설레던 그때의 마음으로 '가난한 자의 라이카'를 써봐야겠다. 예전처럼 필름값이나 현상, 인화 비용 때문에 마음을 졸이지는 않을 테니까 좀 더 피사체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문득 아내가 '당신이 사진을 찍으면 왜 예쁘게 나오지?'라는 말을 했을 때 '그건 피사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라는 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