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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빵 뿅원장 Sep 05. 2023

유도 9단 아버님의 인사.

- 예전의 일기를 꺼내 봅니다. 

  2020년도 즈음이었던 것 같다. 

  80세가 가까워지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세상 무엇에도 지지 않겠다는 까칠한 말투와 날카로운 표정의 어르신이 오셨다. 엑스레이를 찍고 불편한 부분의 상태와 원인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고 이런 치료를 해야 합니다, 비용이 이만큼 듭니다라는 말씀을 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 자식들이 여기 가보라고 해서 왔을 뿐, 너의 실력으로 감히 나를 치료할 수 있겠냐'는 모습에 병원 식구들 모두가 어렵고 불편하기만 한 환자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구멍은 늘 포도청이고, 이 분의 아들, 며느리, 손자가 모두 우리 병원을 다니는 분들이니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처음에는 오실 때마다 불만도 많았다. 오늘은 왜 엑스레이만 찍고 그냥 가는 거냐, 왜 빨리 진행이 안 되냐, 오늘 임플란트 보철물 올라가는 거 아니냐, 예전에 다른 데서 할 때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해봐서 안다 등등... 하지만 이것 또한 어쩌겠는가... 예전에 치료받았던 부분과는 상관없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치료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나는 배운 대로 단계별로 잘 진행을 하고 있는데 환자분이 불평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치료 방법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자세히,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환자분의 넓은 아량과 이해를 부탁드릴 뿐이다. (게다가 목구멍은 늘 포도청이다.)


  계속되는 환자분의 투덜거림과 재촉에 마음도 불편하고 힘도 들어서 '저렇게 내가 못 미더우시면 왜 우리 병원에 계속 오시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빨리 치료가 끝나기를 환자보다 더 기다렸던 것 같다. 


  어느 날이었다. 손자가 따라오면서도 데면데면하게 있고, 치료비가 많이 나올 예정이어서 자제분에게 연락을 한다고 해도 애들 바쁜데 연락하지 말라고 하시는 모습에 갑자기 우리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에구... 우리 아버지도 저러시겠지... 외롭고 쓸쓸한데 그냥 잘 참고 지내시는 거겠지...'라는 마음에 뭔가 애틋해져서 그냥 모든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평불만과 아프다는 하소연 듣는 게 내 직업인데 거기에 한 말씀 더 올려놓는다고 뭐 그리 달라지겠냐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같이 부족한 치과의사를 만나서 고생하신다고, 그래도 환자분께서 잘 참아주셔서 생각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환자분을 대했던 것 같다. 


  이 환자 분의 임플란트 식립 수술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개인적인 일로 힘들었던지라 머리도, 마음도 무거운 상태였다. 늘 하던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생각에 사로 잡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수술 시작 전에 이미 계획은 다 세우고 있었지만 막상 잇몸을 열고 나니 막막하다. 환자분은 오랫동안 입을 벌리고 있기 힘들어하시고, 나는 허리, 어깨, 손목 할 것 없이 다 아프다. 마음마저도 힘들고 아프다. 임플란트를 심을 자리는 뼈가 다 쪼그라들어 있다. 그래도 어쩌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정신을 차려 차례대로 임플란트를 심고, 골이식을 하고 나니 한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잠깐 쉬었다가 엑스레이를 촬영하고 나서 보니 수술은 계획대로 잘 끝났고, 출혈 없이 봉합도 잘 되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고 나니 갑자기 환자분께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신다. 예전에 수련의 때 가끔 돈을 주려 하시던 환자분들이 생각나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나 혼자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주시려는 건가? 그러실 필요 없는데?! 수납만 잘하시면 되는데?!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되는 거였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환자분께서 지갑을 뒤져 신분증 뒤에 있는 유도 단증을 꺼내신다. 


"유도 9단"


살면서 처음 본 고단 유단자이다. 유난히 깨끗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분이었고, 직원들을 통해 교직에 30년 이상 계셨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어설프게 덤볐으면 많이 맞았겠다...) 


(나)  "와! 아버님, 저 유도 9단은 처음 봤어요."

(환자분)  "이 지역에 저 한 사람이에요, 원장님."

(나)  "우리나라에도 몇 분 안 되시지 않나요?"

(환자분)  "그렇죠. 원장님, 내가 유도를 열 살 때부터 했어요. 38년을 교직에 있었고, OO 경찰청 유도 사범도 했어요. 평생을 한 가지 일에 아주 열심히, 성실하게 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원장님, 내가 그동안 보니까 원장님은 정말 성실하게 진료를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많이 고마워요." 


라고 말씀을 해주시는데 힘들었던 마음에 뭔가 울컥 올라오면서 눈물이 찔끔 난다. 요즘 일도 많았고, 병원도 잘 안되고, 몸도 아프고, 뭔가 계획하고 있던 일이 무산이 되었던지라 마음이 힘들었던 날만 계속되었는데 갑자기 다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래... 답이라는 게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대단한 경영을 하는 것도 멋진 일이겠지만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마음을 다해서 진료하는 것이 어찌 보면 지금의 나에게는 해답이리라... 






  동화 속의 결말처럼 그 후로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환자분도, 나도 만족스럽게 치료는 끝났다. 환자분은 지금도 꾸준히 잘 오고 계신다. 여전히 건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정기 검진도 잊지 않고 오시고, "치료가 필요한 부분은 원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말씀과 함께. 내성적인 성격상 표현은 잘 못하지만 오실 때마다 마음으로 말한다. "아버님 덕분에 제 마음도 치료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마음에 새기고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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