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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빵 뿅원장 Sep 21. 2023

일탈.

- 그리고 로망.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 중에 점심시간에 국밥 한 그릇을 시키고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것이 있다. 대부분은 점심시간 직후에 진료가 바로 있고, 혹시나 예약이 없어도 언제 올지 모르는 환자를 기다리느라 정해진 시간에 들어가 자리를 지켜야 하는 모범생 생활을 하다 보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오후 진료가 없는 날에도 집에 가기 바쁘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의 로망 중에 하나가 되었다. 


  한가하기 그지없는 요즘, 예약도 없고, 오는 환자도 없어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일찍 나간다. 보통은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주변 대학교, 공원을 산책하곤 했는데 오늘은 일찍 나오기도 했지만 점심시간 직후에 예약도 없어서 로망을 실현시키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었다. 하지만 모범생 DNA가 어디 가겠는가... 어림도 없지. 소주에 국밥은 무슨...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뭐든지 다 먹을 필요는 없잖아. 남겨도 되는 거잖아.'

'어릴 때는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고 했지만 지금은 혼낼 사람도 없잖아.'

'소주 아니고 맥주 맛만 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


라는 생각에 병원 근처에 새로 생긴 브런치 가게를 갔다. 

브런치 카페여서 샌드위치를 먹어야 되나...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메뉴에 김밥이 있어서 김밥 한 줄과 샐러드를 시켰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혼자 하는 점심 만찬으로는 충분하리라. 그리고 맥주를 한 병 시켰다. 맥주를 시킬 때 뭔가 나쁜 짓 하는 마음이 들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기도 했고, 근처 좌석에 점심 식사 중인 아줌마 모임이 있어서 살짝 걱정되었다. '혹시 저분들 중에 우리 병원 환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 치과 원장 점심시간에 술 마신다고 소문나는 거 아닌가?'라는 걱정에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탈을 하기로 결심했다. 주문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안 보일만한 좌석을 찾아봤는데 워낙 작은 가게여서 그런지 얼굴이 가려지는 곳이 없다. 가장 작은 테이블은 바로 앞에 계산대와 입구가 보이고, 창가 쪽 1인 좌석은 물건이 쌓여있어서 앉을 수가 없다. (나에게 절대 관심이 없을) 아주머니 모임에서 시선이 안 닿을 만한 곳은 계산대가 정면으로 보인다. 등을 돌려 앉으면 내가 핸드폰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등뒤에서 다 보이게 된다. 어떻게 해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어서 그냥 벽에 등을 댈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신 메뉴가 나오자마자 최대한 빨리 컵에 맥주를 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음식을 받아 자리로 돌아와 맥주를 컵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넘치면 안 된다. 한 번에 다 부어야 병을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다... 무사히 맥주를 붓고 병을 바닥에 내려서 숨긴 뒤 사진을 찍었다. 나 오늘 이렇게 일탈했어요!!! 그리고 로망을 반쯤은 이뤘어요!!! 기뻐요!!!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비어 있는 뱃속에 김밥을 채워 넣고, 샐러드를 먹기 전에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이제까지 먹었던 어떤 맥주보다 달았다. 작은 일탈에 눈물이 날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여기까지 만이다. 아쉽지만 언제 어떤 환자가 올지 모르는 거니까 한 모금만 마시고 끝이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면서 남은 샐러드를 다 먹고 천천히 일어났다. 접시를 반납하고 나오는데 뭔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브런치 가게 사장님이 서비스라며 빵을 하나 주셨다. (혹시 저 분 우리 병원 환자분 아닌가...?)


  작은 일탈이었지만 기쁜 날이었다. 아쉬웠지만 로망을 하나 이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난 나답지 않다는 뭔가를 해봐야겠다. 습관이 되지는 않겠지만 활력이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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