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문장만 남길 수 있다면

by 작은 발자국

딸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나에게 뛰어왔다.

“엄마,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딱 한 문장으로만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음… 글쎄.”


“그럼 넌 나한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데?”

“나?”

딸은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난 엄마 딸이어서 행복했다고.”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그 말은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난 외할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 이미 했어…”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골절로 시작된 병은 전이성 골절이었고, 그것은 곧 치유할 수 없는 말기암이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가 떠나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세 달이었다.

세 달은 이별을 준비하기엔 너무 짧고, 마음을 정리하기엔 잔인하게 빠른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선택 앞에 서 있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무엇은 끝내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버지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이 과연 사랑일까, 아니면 잔인함일까.

하루하루가 숨을 참은 채 걷는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모르셨다.

단순히 골절로 입원했고, 수술을 하고 재활만 하면 다시 집에 갈 수 있다고 믿고 계셨다.

나는 그 믿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결국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호스피스로 가기 전, 아버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했다.


끝까지 모르게 해드리고 싶었다. 정말로.

그러나 그것 또한 아버지의 권리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되셨다.

다만 말기암이라는 단어와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은, 끝내 삼켜버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버지는 담담하셨다.

아니, 너무도 평온하셨다.

이미 알고 계셨던 걸까, 아니면 딸 앞에서 모른 척해주신 걸까.


호스피스로 옮긴 뒤에도 정신은 또렷하셨고, 열흘 후면 퇴원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퇴원하면 재활을 더 해야 한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셨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진실을 더 보탤 수도, 희망을 꺾을 수도 없었다.

대신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아드렸다.

말 대신 체온으로 마음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빠…”라는 말을 수도 없이 불렀다.

그 한마디 안에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숨긴 채.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을 때, 마음속에서는 후회만이 밀려왔다.

왜 나는 이렇게 표현에 서툰 딸이었을까.

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이렇게 아껴왔을까.

살가운 딸도, 애교 있는 딸도 아니었던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도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지 못했다.

나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아빠 딸이어서 정말 행복했어.”


그렇게 간단하고 따뜻한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마음 깊숙이 남아 나를 붙잡는다. 대신 아버지가 들을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 모를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아빠, 그동안 고마웠어. 잘하지 못한 딸이었지만… 정말 많이 사랑해.’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정말 떠나셨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나는 삶과 죽음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된다.

사랑은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건네는 말이라는 걸.


딱 한 문장만 남길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직 말할 수 있는 이들에게 먼저 말해두려 한다.

고마웠다고.

사랑했다고.


그 말을 끝내 전하지 못한 채 남겨진 사람이

다시는 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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