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과 낭만
낭만, 사전적 정의로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로 이상적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다. 한 번쯤은 친구와 함께 어디를 간다든가 하는 낭만적인 상황을 꿈꾸곤 하는데, 학창 시절의 낭만 속엔 모두 친구가 옆에 있다. 학창 시절에 꿈꾸는 낭만은 뭐가 있을까. 공교육을 받는 학생이면 야자를 째고 친구와 어딜 간다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거나,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함께 데이트를 한다든가와 같은 낭만을 가슴속에 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 같은 대안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고 싶기도 하고 밤늦게 친구와 어디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낭만도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학창 시절에 간직하는 낭만에는 친구가 들어 있다. 학생들에게 있어 친구는 세상과 마주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다.
다시 오지 않을 10대 시절을 학창 시절이라 부르곤 한다. 학생의 신분으로 살아가며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시절로 여겨진다. 같은 배움 길에 있는 사람들과 손잡고 걸으면 참 좋겠지만, 요즘은 친구가 아닌 경쟁자가 된 것 같은 분위기다. 이전 글 <학생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에서 말했듯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 않는 이 시대의 교육에서 친구는 경쟁자일 뿐이다.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하고 밟힌 친구의 가엾음을 모른 채 한다. 자연스레 세상과 홀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공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친구들과 노는 것을 갈망한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친구는 세상과 마주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며 옆에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는 것을 이 학생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놀고 싶어 하고,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놀고 싶어 한다. 이건 잘못된 게 아니다. 당연한 거다.
낭만은 현실에 매이지 않는 분위기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공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있어 '현실'은 학교와 학원을 반복하는 지긋지긋한 일상일 뿐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건 말 그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자극적인 매체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무엇이 올바른지, 좋지 않은 것인지 구별할 수 없으니까. 자연스레 낭만을 꿈꾸기가 어려워지고 낭만을 잃어버린 사회는 점점 시들어 간다.
얼마 전 인문학 수업에서 다뤘던 이반 일리치의 <우정에 대하여>라는 글을 읽고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짧았지만 생각보다 쉽게 해석이 되진 않았다.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쥐어짜 내며 어렵사리 생각을 했다. 우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글에서 우정이란 덕성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라고 한다. 덕성은 좋은 일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성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공동체적 삶에서 함양되었다고 한다. 공동체가 무엇인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친구와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함께 사유하고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시험범위와 어느 학원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하는 걸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우정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도 나오듯 우리는 자동차의 등장으로 발의 사용가치를 제거해 버렸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체계(공교육)로 인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 배움, 우정을 나누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친구는 없다. 경쟁자다. 낭만 따윈 없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너무나 잔혹하면 도피하기보다는 체념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내니까. 부제목에 있는 그 시절 낭만은 집어던지고 훗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낭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부정에 가깝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에 대한 기준이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따지고 보면 기준이랄 게 없다. 오히려 기준이 있으면 이상한 거다.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가며 서로에게 배우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니 더 그렇다. 품고 있는 낭만에 친구가 등장하는 것은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상술했듯 친구는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에 옆에 있는 존재이니까.
계속 말하는 낭만이 아니더라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곤 한다. 나 말고도 다른 인격체를 존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공공장소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하지 않고 친구를 감싸주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공교육은 이런 것을 일체 단절시킨다. 함께 살아가는 법보다는 이기는 법을 알려준다. 함께 사는 존재인 인간이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는 저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이게 현대 교육의 비극이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낭만의 불꽃마저 꺼져가는 지금 우리는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길에서 만나면 쓰레기를 길가에 내다 버린다거나, 입에 욕을 달고 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근묵자흑이라고 옆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친구가 있으면 물들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아이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지 못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이 조금 서툰 것이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기 참 어렵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서로의 가슴속 낭만을 나누기만 해도 될 텐데. 씁쓸한 현실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낭만을 간직하며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라는
낭만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