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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찬 Dec 27. 2022

생각하는 힘이 약해진다.

대안학교 학생의 디지털 사회 고찰

빨리빨리가 대세인 한국인의 특성인 걸까? 최근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같은 1분 내외의 짧은 영상 매체의 유행은 걷잡을 수 없게 퍼져나갔다. 1분이 채 안 되는 영상을 보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 시청 후 다시 반복. 계속 반복된다. 이러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흘러있고 내가 뭘 했지라는 공허함이 밀려온다. 그것도 잠시. 다시 유튜브를 켜고 쇼츠 버튼을 누른다. 


어느 순간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우리 사회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어른뿐 아니라 나 같은 청소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언제부턴가 세 줄 이상이 아니면 글을 읽지 않는 친구가 생겼고, 조금이라도 긴 글이면 이를 기피하는 어른과 학생들이 보였다. 이뿐인가. 생각의 폭이 짧아져 시도 때도 없이 폭언을 내뱉는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스며든 콘텐츠가 짧고 자극적이며 무엇보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접근성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변함에 따라 사회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나는 이런 콘텐츠를 보며 댓글을 항상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 콘텐츠에 관한 재미요소를 댓글에서 집어주는 경우가 가끔 있어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을 겪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게임 영상이었다. 게임의 하이라이트를 짧게 정리한 일종의 편집본이었는데 영상의 댓글 중 하나가 '엄청 잘하시네요'와 같은 문장이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 영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낸 글이었으니까. 진짜는 대댓글에 있었다. 대댓글에는 그 의견에 인신공격으로 반박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나는 이걸 보고 무엇인가를 느꼈다. 댓글은 해당 콘텐츠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주로 쓰는 글인데 댓글에 대한 반박을 굳이 인신공격을 섞어서 해야 했을까? 그 대댓글의 대댓글에서는 싸움이 벌어졌다. 익명이라는 가면 안에 얼굴을 숨긴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런 콘텐츠의 자극적인 요소는 갈등 상황에서 힘이 더 세진다. 가령, 남녀 성별 간의 갈등을 콘텐츠로 해 '페미니즘은 나쁜 거다' 등의 내용이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맞다는 주장만을 내세운다고 가정해 보자. 그 영상의 조회수가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페미니즘은 무조건 나쁜 거다.'로 인식한다. 1분 내외의 짧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거다. 반대의 입장은 듣지도 않은 채 사람들의 머리 깊숙이 뿌리내리게 만든다. 만약 이와 상반되는 영상이 나온다고 해도 앞 영상에 찌들어든 사람은 상반되는 영상을 거들따보지도 않는다. 결국 미디어에 의지해 세계를 볼 수밖에. 낮은 접근성과 자극적인 내용의 합작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사회는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되지 않는다. 미디어는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니 무서운 존재다. 한 뼘만 한 크기의 기계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해 어느 콘텐츠나 그 댓글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한다. 미디어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주체로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갈 청소년에게 미래가 있을까? 모두가 이런 콘텐츠에 시간을 소비하고 여기서 뒤처지면 낙오자가 될 것 같은데 나도 이런 것에 몸을 맡겨야 할까? 모두가 하는 것이 곧 옳다고 치부되는 세상에서 나 같은 사람이 설 자리는 없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미디어 기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은 인간이 만든 미디어 기기가 앗아가 버렸다. 자신의 가치관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나라도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은 책이었다. 나만의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겠다는 다짐을 한 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건 말로만 쉬웠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해야 했고 그게 잘 안 되면 책을 덮고 싶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읽은 건 책을 덮고 싶을 때마다 몰려오는 '나도 이런 콘텐츠의 희생양이 되었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좀 바뀌고 싶었다. 짧은 영상을 다 보고 난 후 몰려오는 공허함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살아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내가 말하는 책 읽기는 단순히 읽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며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는지 돌아봤다. 이 과정에서 책을 다시 이해하곤 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건 콘텐츠와 댓글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과 달리 읽고 쓰는 과정은 자신만의 호흡으로 자신만의 글을 쓰며 자신만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뼘이 안 되는 기계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는 대신 책을 읽는다.  


조금 안타깝지만 이건 청소년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다. 다시 말해 청소년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나를 비롯한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청소년이 느낀 디지털 사회는 훨씬 심각하다. 어른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스며든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우리의 생각을 빼앗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보기에는 가슴이 아프다. 마음에 형태라는 게 있다면 그걸 사포로 문대는 기분일 것이다. 어른들도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손으로 가꾸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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