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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ul 11. 2024

N행시와 청춘과 여름

1.

  서신중학교로 N행시 짓기 대회가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며 아이들이 쓴 글을 읽었다.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도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 하고 혼잣말을 하게 되는 시도 있었고, 오래 그 자리에서 여러 번 읽고 싶은 시도 있었다. 나는 한 아이가 쓴 시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늘했던 겨울이 지나/ 기하고 따뜻했던 봄이 지나/ 학교에 마침내 여름이 찾아왔다/ 교는 여름 특유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로 가득 찼고/ 실에서는 청춘의 시작점에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여름의 설렘이 퍼져간다


  나는 우연히 만난 아이에게 시를 읽었다고 하면서 '신기하고 따뜻했던 봄'이나 '청춘의 시작점'이나 '여름의 설렘이 퍼져간다'와 같은 문장들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그런 문장을 좋아한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날 나는 퇴근 후에 서점에 갔다. 그런 문장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서둘러 책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책을 고를 것도 없이 신간 코너의 <죽이고 싶은 아이 2>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바로 서점에 도착한 그 책은 비닐에 싸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왠지 아이가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 책이어야 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책이 나를 이리 오라고 부르는 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문득 책이 또는 노래가, 그림이, 하늘과 바람과 숲과 구름이, 어떤 사람이 우리를 부르는 날, 그 마주침에 응답하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2.

  아이가 쓴 시를 읽고 답장처럼 나도 N행시 쓰기에 참여했다.


랍 속 빛바랜 옛 노트에는/ 기한 별자리와 알 수 없는 수학기호와 친구들의 이름과 작별의 시와 오늘의 날씨와 복잡한 내 마음이 적혀 있고,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쓴 '기운 내'와 동그랗고 작은 나의 눈물방울도 남아있다/ 학교 때 나는 자주 불안했고, 가끔 기뻤고, 때로 즐거웠고, 내내 내가 싫었고, 종종 따분하고, 끝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학교를 떠나온 지금, 그 모든 시절의 모든 나를 꼭 끌어안아주고 싶다/ 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열넷, 열다섯, 열여섯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사. 랑. 한. 다. 고/


  말귀가 밝은 사람들은 금방 알았겠지만 이 글은 그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의 마음을 상상하여 쓴 것이다. 혹은 사춘기를 지나온 우리의 마음이기도 할 것 같다. 이렇게 그 아이와 나는 같은 시간을 살며 서로 연결된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모든 시절의 모든 너를 꼭 끌어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나는 아이에게 간절하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3.

  나는 꽃이 그려진 엽서를 사서 손 편지를 쓰고, 영어 시간이 끝나 계단을 내려오는 아이에게 그 책을 주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쓰는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아이는 책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었고 무척 좋아하는 책이라고 했다. 고요한 그 아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가끔 그런 순간들이 있다. 우연처럼 너와 내가 연결되는 순간.    

  오래전, 시창작 수업 시간에 한 아이가 자신이 안양의 봄빛병원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쓰고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몇 명의 아이들에게 글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종이 치려고 했으나 나는 창가 쪽에 앉아 있는, 별로 말이 없었던 남자아이에게 마지막으로 글이 어땠는지 물었다. 아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도 안양의 봄빛병원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두 아이는 같은 해에 같은 병원에서 태어났다.     

       

4.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펼쳐보지 않고 아껴둔 책을 읽고 나서 아이는 내게 소설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안타까워서. 아이의 표정은 정말 애틋했고 슬퍼 보였다. 우리는 복도를 걸어가며 아주 짧게 대화를 나누었으나 아이의 슬픔은 내게 오래오래 남아있다.   


5.   

  N행시 짓기 대회 수상자가 복도에 붙었다. 학생 자치회 아이들이 수상자를 선정했고, 나와 그 아이 둘 다 거기에 적혀있었다. 상품으로 젤리를 받았다. 나는 아직 아이에게 말하지 못했다. '이런 상은 너의 문장에 대한 동료들의 응원과 지지니까 충분히 기뻐해도 괜찮다고', '너의 문장이 그들에게 도착했다는 의미일 거라고', '너의 시가 아이들의 마음에 가서 무언가 자국을 남긴 거라고', '네가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문장을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너는 겨울의 서늘함과 봄의 신기한 따스함과 풋풋하고 싱그러운 여름을 느끼는 계절의 전문가라고'


6.

  너의 청춘과 여름을 응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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