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원 Jul 26. 2022

여름의 책

책의 용기에 대하여

1.

  파주 지지향 정보도서관에 강의를 하러 갔다. '삶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올해 임용된 신입 선생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민음사 앞에 주차를 하고 잠시 여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주출판도시의 작은 거리와 출판사와 인쇄소 건물과 길가의 나무와 사람들과 공기는 책을 닮아 고요하고 조용하고 가만하고 은은하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속삭이며 말하고 천천히 걷자고 약속이나 한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옆에 두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지듯 책 가까이에 있으면 책과 같아지기라도 하는 걸까?    


  처음 작가의 마음속에 작은 불꽃이 일어나고 눈 밝고 생각이 섬세한 편집자가 그것을 알아보고 낱장의 원고가 하나의 작품이 되고 표지의 그림과 디자인과 색깔, 글씨체와 책의 크기 등이 정해지고 수정을 반복하면서 인쇄소에서 하나의 책으로 묶여 나와 세상의 서점들로 가기까지 한 권의 책에는 언제나 손을 움직여 작업하는 수공업의 정신과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책에는 애틋함과 절실함 같은 것이 있다.


  파주출판도시에는 책의 탄생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노동을 다하는 사람들이 주는 어떤 고요와 침묵 같은 것이 있다.        


2.

  다큐멘터리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출판이 감시의 대상이고 불온한 집단'으로 여겨진 아픈 시대를 통과하며 '글의 집을 지어보려는 마음', '번듯한 공간에서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건축가와 출판인이 모여 함께 '책을 위한 도시'를 만들었던 '위대한 계약'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위대한 계약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출판문화와 건축문화에 주어진 역사적 소명과 시대정신의 이름 아래 계약서를 '위대한 계약서'라 이름한다." 자신의 입장과 이익보다 공동의 철학과 가치, 지향을 향해 연대하는 출판인과 건축가의 마음, 수많은 난관과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실현하고 구현해낸 실천의 시간들 앞에서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의미 있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오래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파주출판도시에서 느낀 것들은 모두 이 위대한 계약의 정신과 분투에 빚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도시를 만드는 과정은 책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용기와 닮아 있었다. 지난 학기 고3 독서 수업 시간에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변화가 일어난 경험이나 실제로 어떤 행동으로 실천해본 적이 있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떤 아이는 '동물권'에 관련된 책을 읽고 육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경험을 이야기했고 어떤 아이는 진은영 시인의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는 글을 읽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졌던 연민의 태도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수업 시간, 그 아이는 새로운 세계와 인식을 만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독서 수업 시간에 내게 주어진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과 <소년을 읽다>와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와 <패트릭과 함께 읽기>를 엮어서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고 싶었다. 이 책들을 연결하는 어떤 단어가 '책의 용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큐멘터리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3.

  '삶으로서의 민주주의' 강의에서 나는 시 창작 수업 시간, 학생이 노트에 적은 문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미워서 혐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모를 때 그에 대해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출 때 혐오하게 된다. 그것을 알기 위해 애쓰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또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앎과 사랑은 서로를 향해 있고 알고 사랑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씩씩한 마음으로 여름을 지나가고 싶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알기 위해 애쓰고 있을까?    


  강의가 끝나고 출판도시의 거리에 차를 세우고 여름 저녁 무렵의 나무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따라 손을 흔드는 초록의 나뭇잎들이 하루의 마지막 햇살 속에서 빛나고 있었고 들판의 풀잎들은 함께 모여 밤의 이슬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높은 전봇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늠름하고 씩씩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는 새를 바라보며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의 책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작가의 이전글 "넌 봄날의 햇살 같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