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원 Aug 08. 2022

당신은 여름밤을
가볍고 아름답게 걸어가요

1.     

  오래된 여름의 일기를 뒤적이다 이런 문장을 만났다. '당신은 여름밤을 가볍고 아름답게 걸어가요' 아마 그날은 처음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고 그녀와 나는 삼겹살을 먹은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가 있다. 어떤 말이든 따뜻하게 들을 수 있고 어떤 마음이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좋은 사람 앞에 서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지듯이 부드럽고 다정한 마음은 아름다운 것들을 불러온다. 여름 저녁, 소란스러운 고깃집의 매캐한 연기와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천천히 고요하게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야외 테이블에서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본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는데 여름의 골목길을 따라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머금고 버드나무 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그녀를 또 오래 바라본 기억이 있다. 잊을 수 없고 오래 남는 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야지, 쉽게 들뜨지 않고 쉽게 판단하지 않고 내 이야기보다 당신의 이야기가 더 궁금한 관계를 만들어야지 하면서 그해 여름은 따뜻하고 온화하고 흐뭇한 기억을 남긴 채 지나갔으나 언제나 그런 만남은 삶 속에서 반짝이며 오래 빛을 뿜어낸다.   


2. 

  2학기에도 시 창작 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세 과목에 스물두 시간을 하느라 1학기 수업은 고됐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내 마음과는 다른 구설에 오히려 힘겨웠다. 이해받지 못하는 마음은 아프지만 또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어떤 별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가를 더 생각하려고 한다. 어떻게 소통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내용으로 소통하는가는 더 중요하다. 내 마음이 진짜인 것인지, 나는 어떤 꿈을 지니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내가 나를 설득시키는 것이 먼저다.  


  예전에 여름에서 겨울까지 수업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말에 감정과 의미를 담기 어려워졌고, 누군가에게 들려줄 혹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찾기 힘들었다. 나에게 수업은 말을 단련하고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일상의 짧은 순간들, 세상의 여러 사건들이 수업으로 연결되던 나날도 있었다. 작고 하찮아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예민하게 깨어 있으며, 삶과 세상과 사람을 향해 열려 있으려고 노력했던 나날이기도 했다. 그런 순간들이 오히려 나를 살아있게 했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수업은 언제나 괴롭다. 그것은 교사로서 실존적인 고민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이 수업이 아이들과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조차 발견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수업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들과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좌절은 컸고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자책으로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수업이 나와 아이들과 세상에 분명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야 하고 해 왔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해야 하는지, 왜 지금 여기 필요한지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그 자체를 회의하고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해, 고통받고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정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탐구하고, 수업을 통해 세상의 난폭한 성공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처와 슬픔과 고통을 건너는 법과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 무엇보다 그 속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을 오래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2학기 수업을 오래전 따뜻했던 그해 여름처럼 기다리고 있다.  


3.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이 아득하고 막막한 시간을 어떻게 견디지, 어떻게 통과할 수 있지?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아 불안이 불안을 더 불러오기도 한다.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답의 방 안에 나를 밀어 넣고 지금 내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아야 할 것 같다. 큰 바다의 거센 파도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일상의 작은 언덕들을 내 힘과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만 넘어가려고 애써야 할 것 같다. 

  더 깊고 어두워지려는 마음을 멈추고 올리브 나무에 물을 주거나 시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어보거나 내리는 빗줄기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거나 오늘의 나를 기꺼이 안아주어 내일의 나로 흔쾌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대단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오늘을 잘 견디고 지나온 것만으로 나를 축하해주는 것.


  가볍고 아름답게 여름밤을 걸어가는 당신처럼.            

작가의 이전글 헤어질 결심, 사랑의 깊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