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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Aug 07. 2022

헤어질 결심, 사랑의 깊이

당신의 마음과 같은 내 마음

1.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 해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랑의 체험은 남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하고 고통의 체험은 그 말의 깊이를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 사랑이 당신과 당신의 사정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통은 당신이 살아온 그 세월과 시간의 깊이를 정확하게 느끼고 감각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뜻일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오히려 체험이다. 사랑도 고통도 정작 우리에게 의미 있어지는 순간은 그것을 경험하고 체험할 때이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가 해준이 말한 '붕괴'를 정확히 이해한 것은 그녀 자신이 또한 붕괴를 경험하고 체험했기 때문이다.(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서래는 오물을 뒤집어쓴 채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었다. 살아있었으나 존재하지는 않은 것이다.) 해준이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고 말하고 떠나자 서래가 소파에 앉아 울었던 것은 해준이 떠났다는 사실보다 해준의 무너지고 깨어진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아픔을 알기에 나도 너무 아프다는 마음. 


  상상하고 시뮬레이션해보고 머릿속에서 떠올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고 움직이고 말하고 쓰고 생각하는 것. 경험은 구경하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정작 사랑에 참여할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아픔을 각오해야 하고 사랑과 함께 우리 앞에 도착하는 것들 속에 기쁨과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불편해한다.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미래에 자신을 던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나를 맡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고통 모두 우연에 기대고 있다.  

 

2. 

  <헤어질 결심>을 두 번째로 보고 영화관을 나온 날은 굵은 비가 내렸다. 이전엔 알 수 없었던 작은 디테일들이 보였고, 긴장하지 않고 장면의 뉘앙스에 스며들기도 했고,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이해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것의 디테일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디테일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이제 막 울기 시작할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도 지금 먹고 있는 음식에 얼마나 맛있어하는지도 알 수 있으며, 모든 빗소리를 좋아하나 특별히 밤의 빗방울을 더 좋아하는지도 작고 연약하고 구슬프나 밝고 명징하고 청아한 풀벌레의 소리를 좋아하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서래와 해준의 사랑의 깊이와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두 배우의 연기였다.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깊이와 본질이 오래 감정을 흔들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결심하고 행동하는 서래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서래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을 재워줄 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에 아파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해준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내가 당신의 불면증을 해결해주리라는 그녀의 비장한 표정!) 서래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 잠을 빼주고 싶어요. 건전지처럼."

  끝내 해준에게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서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말할 때 서래는 무너지고 부서진 해준의 존재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내가 망친 당신의 삶을 다시 회복시켜주고 싶은 마음, 당신이 본래대로 돌아가 자부심과 품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 같다. 거기에는 자신보다 상대방의 삶과 존재를 생각하는 사려 깊은 사랑의 마음이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해준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서래가 하는 일련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결심과 행동들에는 해준에게 오래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해준이 형사로서 떳떳하고 당당하고 새롭게 자기 일을 시작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다. 해준에게 직업적 자부심은 자신의 존재 근거였으니까. 

  마지막까지 서래는 해준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자기 앞의 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어떤 실패나 패배, 회피와 절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결국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해준은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자신의 말이 결국 서래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으리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서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3. 

  해준이 후배 형사에게 전화해 질문 그만하고 빨리 서래를 공개 수배하라고 이제 만조가 되면 찾기 힘들 거라고 다급하게 이야기하면서 팔을 늘어뜨린 채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조마조마해할 때 그의 마음속 이제야 깨달은 사랑의 깊이. 

  파도가 더 거세게 치는 바다를 손전등을 들고 헤매며 파도에 넘어지면서 끝없이 서래를 부르는 그의 뒤늦은 깨달음, 넘치는 후회, 뼈아픈 상실, 당신 없는 세상의 쓸쓸함 같은 것이 오래 내 마음에 남는다.  


영화 <헤어질 결심> 해준과 서래  


 4. 

   그 후회와 상실이 얼마나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는지 나는 안다. 너무 늦지 말자는 마음, 그러니 언제나 먼저 가 있자는 마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오늘 저녁으로 미루지 않고 먼 훗날을 기약하지 않으며 지금 내 눈앞의 바로 그 사람, 그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쓰고 노력하고 싶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하고 싶다.


  해준 앞에서 범인이 뛰어내려 죽은 사건이 있던 날, 서래가 다급하게 해준의 집으로 들어와서 왜 왔느냐는 질문에 "재워주러요"라고 답한 것처럼. 


  지금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급하게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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