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원 Aug 15. 2022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와 당신

1.

  여름의 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는 그리운 것들을 불러온다. 작고 투명하고 슬프고 맑은 그 소리는 당신이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반복해서 확인해준다. 그럴 때면 견디기 힘들어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당신의 부재는 나의 슬픔이다. 우리에겐 모두 그리운 시간, 사람, 장소, 사물들이 있다.   

  2016년 1학기 시 창작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문집을 만들었다. 문집의 제목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이다. 기억에 남는 소리, 맛, 냄새, 촉감 같은 것들에 대한 글쓰기에서 어떤 아이는 이렇게 썼다.


  "내 기억 속에 제발 남았으면 좋겠는 소리.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 몇 년 동안 같이 살아왔는데 사랑해 왔는데 그 세월이 무색할 만큼 나는 엄마가 죽은 뒤 몇 달 아니 아마도 겨우 몇 주 뒤 엄마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단 하나의 잔상도 남기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엄마가 들었던 노래들을 찾기 위해 애쓰고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애달프게 소망한다. "꿈에서라도 누가 나에게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꿈에서 깬 뒤 또다시 엄마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더라도."


  짧은 만남 후에 긴 이별이 있더라도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은 마음, 다시 헤어지고 그리워져서 못내 아프더라도 한 번은 보고 싶은 마음, 아이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역설적으로 엄마를 더 기억할 수 있게 한다.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목소리' 그 자체를 기억하게 한다. 그럴 때 엄마는 선명히 아이의 생각과 마음 안에 있다. 당신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언제나 있게 된다.


  아이는 이 슬프고 간절한 글의 마지막에 엄마의 계란밥 이야기를 한다. 아빠가 해주는 계란밥과 엄마의 계란밥의 맛이 어떻게 다른지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 계란밥을 이제는 먹을 수 없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엄마의 계란밥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언제나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어야 하며,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    


  오직 당신이기 때문에 풀벌레가 울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리고 꽃이 핀다. 가을이 가까이에서 당신처럼 내게 오고 있다.  


2.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도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차디찬 아침, 묘향산행 승합자동차에 오른 나이 어린 계집아이'에게서 '추운 아침에 꽁꽁 언 손으로 찬물에 걸레를 쳤을' 사연을 헤아릴 수 있었던 시인 백석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 같다.

  시가 어떤 특별한 감수성을 가지게 되는 순간은 이렇게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볼 때이다. 때로 거기에서 새로운 시의 마음이 태어나기도 한다.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다'라고 썼을 때,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본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과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로 가득 차 부푼 마음과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마음은 모두 그리운 마음의 조각들이다.

  그럴 때 그리움은 과거에 연연하고 집착하며 머물러 있는 마음이나 슬픔으로 무너져서 깨진 유리조각처럼 부서진 마음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당신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버티고 견디면서 씩씩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윤동주는 이 아름다운 시의 마지막에 '자랑처럼' 이렇게 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3.

  어떤 아이가 3월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이때 나는 아이들이 있는 베란다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직 겨울의 바람이 남아 있었고 봄눈이 오기도 했던 3월이었다. 그러나 3월은 무엇보다 시작의 계절이다. 내 발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이해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에 언제나 다른 세상의 하늘과 구름과 별과 달이 있다.    

  언젠가 버티고 견디기 어려워 내가 모든 걸 놓아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나에게 말해주었다. "만약 당신에게 그럴 때가 온다면 당신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요."  이것은 하늘과 구름과 별과 달을 바라보는 높은 마음이다.    


  8월은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의 계절이다. 2학기의 모든 시간을 기다리며 삶의 폐허 속에서도 사랑의 꽃은 필 수 있다는 것을 믿기로 한다. 씩씩하게 당신을 그리워하며 함께 가을로 나아가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여름밤을 가볍고 아름답게 걸어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