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왔다. 저마다의 시간들을 표정에 담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고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며 아이들은 다시 만난 기쁨과 반가움을 나누고 있었다. '開學'처럼 아이들은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를 간직한 채 마음을 열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듣고 싶었던 좋은 수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시 창작 수업을 신청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이도 있었고, "무슨 힘든 일 있었니?"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먼저 "저 힘들어 보여요?"라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이도 있었고, 고3 수업을 아이들과 함께 마음 모아 신청했는데 내가 개설해주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아이도 있었고, 시끄러운 교실 책상 위에서 세상모르게 잠이 든 아이도 있었고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아이들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작은 선들이 되어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시간이 흩어져 사라지게 두지 말고 그 시간이 각자의 향기로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활동과 일과 공부가 자신의 삶과 내면의 힘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 '자유의 삶'과 함께 '은유의 삶'도 가르쳐야 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가 마음을 열 때 가능하다. 잘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유연하고 열려 있다. 굳어진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개학은 그래서 마음을 열어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배우고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2.
고2 태현이가 교장실에서 포스트잇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홈베이스 정리를 하다가 노트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는데 누군가의 시 창작 수업 노트인 것 같아서 가져왔다고 했다. 첫 장을 열어보고는 더 읽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교장선생님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는 정성스럽게 노트의 주인을 찾아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 거기에 담긴 깊은 마음의 풍경을 존중해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1학기 시 창작 수업 시간에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선한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나는 두 손으로 아이가 건네주는 노트를 정중히 받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노트의 첫 장을 열자마자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단정한 글씨체로 '4년도 더 된 일이다' 이렇게 문장이 시작되었다. 작년 시 창작 수업을 들었던 정겸이의 노트였다. 아마 첫 글쓰기 시간에 첫 발표자로 이 글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노트가 내게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네가 쓴 글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겠노라고 말했다. 아이는 부끄러워했지만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3.
가을과 겨울의 2학기, 우리의 시간에 왜 미움과 권태 같은 것이 없겠는가? 갈등과 다툼도 오해와 짜증도 있겠고 슬픔과 좌절, 원망과 무기력, 그에 못지않은 생명과 갈망도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들은 학교 안에 그대로 있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그 삶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고 끈질기게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르치는 일에 삶이 묻어나게 해야 한다. 삶이 없는 프로그램과 교육과정은 대화도 만남도 관계도 배움도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벼리가 교장실에 다녀갔다. 아이는 마을 서점에서 일하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회피하지 않고 부딪치고 맞닥뜨리면서도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연습 중이라고 했다. 더 이야기하면 오열할 것 같다고 하며 그만 가보겠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아이는 내가 안전해서 울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벼리에게 계속 안전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4.
졍겸이의 노트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이야기가 낙서처럼 적혀 있었다. 작년 수업시간에 우리는 그 책의 문장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파멸하여 오랜 과거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오직 냄새와 맛만은 더 연약하지만 더 활력 있고, 더 비물질적이며, 더 끈질기고 더 충실하여, 마치 영혼과도 같이, 상기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오래도록 계속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계속 살아남아 있는 관계와 감각,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물해주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다. 오늘은 개학날이다. 아이들과 함께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당신들에게도 마음을 열어 사랑을 전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