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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Sep 18. 2022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1.

  지난 목요일, 시 창작 수업 첫 글쓰기의 주제는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였다. 박형준 시인의 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에서 빌려온 것이다. 가난한 젊은이에게도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히듯'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하지만 지하방에는 이불이 없었고 여자는 떠났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고'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여자는 다시 돌아왔다. 젊은이는 그제야 그녀만을 위해 아껴두었던 요를 방에 깔기 시작한다. 젊은이는 천진하게 웃지만 여자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지하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불의 끝을 만지며 천진하게 웃고 있는 가난한 남자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다른 마음을, 창문으로 사과나무 꼭대기만 보이는 남자의 작고 남루한 지하방을 생각한다. 남자는 애썼으나 여자는 떠났을 것이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2.

  수업 시간에 어떤 아이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생각날 때마다 울게 되는 것은 '사무치는 마음'이라고. 나는 사무치는 마음에 대해서 물었다. 아이는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이라고 했다. 인생의 어떤 일들은 우리를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앞으로 살아갈 무수히 작고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마음에 깊게 박힌 사무치는 마음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슬픔에도 힘은 있어서, 때로 울음은 삶을 밀어 올리고 끌어올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에겐 앞으로 나아가는 일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 <시>의 양미자는 집단강간을 당해 죽은 소녀를 정확히 이해했고 그 순간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사건이 일어났던 과학실에도 가보고, 그 일에 참여한 손자에게 '왜 그랬어'라고 절규하기도 하고, 소녀를 추모하는 미사에도 참여하고, 소녀가 뛰어내린 도로 위에서 소녀처럼 강물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그녀는 점점 소녀가 되어갔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시를 쓸 수 있었다.

  가을 일요일 저녁의 고단하고 지친 몸, 외로움과 쓸쓸함과 부끄러움의 눈물, 그리운 것들을 향한 사무치는 마음 곁에 우울과 불안과 싸워 이기겠다는 작은 의지를 세워둔다. 나도 당신도 삶을 피하지 말자고, 하여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남겨보자고 이야기해본다.


  양미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의 제목은 <아네스의 노래>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나의 오랜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 <시>


3.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울게 된다. 그러나 그 울음에는 언제나 세상과 싸워 볼 희망과 용기가 함께 있다. 하늘을 덮은 작은 구름들, 젖은 빨래가 햇볕에 마르는 소리, 올리브 나무에 앉은 햇살, 숲과 나무가 뿜어내는 초록의 향기, 깨끗하게 닦아서 내일 신을 운동화, 시들어가는 꽃과 피어나는 꽃, 저녁 식탁의 멋진 그릇, 아침의 마음 따스한 차, 바람을 따라 햇살을 튕겨내는 풍경소리, 시인의 말과 오후의 피아노, 하루를 살아낸 당신과 우리에게 행복이 있기를. 행복한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두 손을 모으고 가슴에 가져다 대어 기도해본다. 당신의 남은 오늘 저녁과 다가올 내일 아침을 위해 씩씩하고 용감하게 기도해본다.     


  글쓰기의 주제를 바꾼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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