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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ul 06. 2022

'고2 시창작 수업' 종강 편지

'따뜻한 불편함'

  한 학기 수업을 마칠 때가 되었다.

아직 전하지 못한 이야기와 듣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아서 아쉬움과 애틋함이 깊다.


어떤 아이들은 이 수업이 따뜻했다고 말하고 어떤 아이들은 불편했다고 말한다.

'따뜻함'과 '불편함' 모두 정확한 말인 것 같다.

자신의 내면, 때로 상처와 고통과도 마주해야 했으니 불편했겠고

그것을 교실의 친구들에게 꺼내 놓았을 때 받은 정확한 피드백과 진실한 마음이 따스했겠다.


아이들 각자각자에게 줄 시집을 사고, 시집마다 짧은 편지를 썼다.

아이들에게 종강하는 날 읽어 줄 글도 썼다.

이 수업은 끝났지만, 아이들이 종강이후에도 이 수업을 떠올려준다면

우린 다른 곳에 있지만 시창작의 시간을 같이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희망해본다.




시  창작 수업의 어린 시인들에게            

  


1.

  책을 읽을 때, 노래를 들을 때 어떤 문장을 적어두거나, 노래가 들어있는 음반을 찾아 봐요. 거리에서, 전철에서, 버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저녁 무렵의 마지막 햇살, 노을이 지는 퇴근길, 새벽의 텅 빈 거리와 잠이 덜 깬 아이에게 다시 불러주는 자장가, 약속시간보다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며 읽는 시와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본 청 보리밭과 하얀 구름 파란 하늘, 돌아오는 길에 떠오르는 달과 별.


 그 무수한 시간들에 당신들이 깃들어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에요.

아! 당신들이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당신들이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당신들이라면...


  지금 제 옆에 당신들은 없지만, 또 언제나 있습니다.  

보고 듣고 만지는 생의 순간들이,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꼭 붙잡아
언제나 당신들에게 속삭이며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기보다 같이 있고 싶은 날을 그리워해서 그런가 봐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곁에 있음은 허락되는 거예요.

아주 가까이에 있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요.
우리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
그래서 우리는 실패했지만, 거기엔 언제나 더 나은 실패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좋은 시란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언어로 가장 환상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해요.
어쩌면 이 말은 우리의 수업이 가닿고 싶었던 꿈이고,
우리의 삶이 다다르고 싶었던 최선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수업에서 저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말로 환상적인 생각을 전했던 것인지
매일 회의하고 의심하고 걱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제가 이 수업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해요.



2.
  그네를 타던 아이는 더 멀리까지 더 세게 밀어달라고 해요.
내 손을 벗어난 아이가 멀리 하늘까지 올라가 사라져버릴까 겁이나요.
무엇이든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빠져나간 자리는 견디기 힘들어요.

이런 날에는, 멀리서 그립고 보고픈 사람이 와주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땐, 서둘러 마중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일은 없기를.
언제나 먼저 가 있고 가장 나중에 돌아오기를. 벌써, 내가 그에게 가고 있기를.
간절하게, 외롭게 바라기도 해요.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잠들지 못하는 밤의 골목, 뒤척이며 구겨놓은 마음의 이불,
잘못 내린 지하철역, 가슴으로 날아온 돌멩이, 뼈아픈 후회,
혼자 쓰는 이별의 각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버린 바람 같은 시간만이
나에게 있더라도, 그것밖에는 없더라도.


  사랑을 다해 사랑할 때,
눈앞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것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말을 걸 때,
우리는 이미 시인이에요.  
끝내 그 손을 붙잡아주지 않아도, 그 말에 응답해주지 않아도.
그래서 지울 수 없는, 눈물 같은 문장 하나를 내 삶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러니, 이제는 당신들 마음을 보여주세요.
당신들의 저녁과 아침, 당신들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들려주세요.

하나의 문장을 떠올린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삶을 떠올린다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문장이 떠오르나요?
  삶이 고달프고 막막할 때
늦은 밤 자주 깨어 창밖을 바라보게 되고
이루어낸 것도,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마땅히 없는 허허로운 날이면
저는 이 수업의 문장들을 떠올릴 거예요.
그러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따뜻해질 것만 같아요.
그럴 땐, 당신들도 이 수업의 문장들을 떠올려주시길.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면
당신은 그 문장을 좋아했고 사랑했던 것이니
그 문장이 주는 진실의 힘으로 또박또박, 꿋꿋하게 써 내려가시길.


  저는 당신들이, 삶이 선사하는 순간의 은밀한 감정,
감각으로 밀려오는 소리, 냄새, 감촉 등과 같은 것들,
혹은 희미한 생각들을 기억하기를 희망해요.
정리되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그 애매모호함을 견디며
하루하루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가 되기를 소망해요.


  우린 마지막 수업을 향해 가고 있어요.
우린, 얼마나 먼 들판과 언덕과 강물의 길을 지나
이렇게 만나게 된 걸까요?
또, 이렇게 만났다 다시 헤어지게 된 걸까요?
인생은 알 수 없고 사랑은 깊어져요.

저에게는 자책밖에 없지만 만약 자부심이 있다면
그건 모두 당신들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내 자부심, 내 빛나는 어린 시인들.


  우리의 약속처럼
첫눈 오는 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니, 영원히 못 만나도 끝내 만나고
잠시 만나도 오래 만난 것이길.
우리가 문득 어느 날, 이 수업의 한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 있지만 같은 시간을 사는 거예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늦은 밤 잠들기 전, 오늘 나의 삶을 하나의 문장으로 기록하는 사람이 되어 주세요.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아껴주세요.      
세상의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들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주세요.
고마워요.
그럼, 여름날 모두 안녕히.               
이제 정말, 안녕히.
어린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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