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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Sep 27. 2022

'가슴 미어지도록 평범한 일들'

 

1.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사진사 정원과 주차단속원 다림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절제된 시선으로 죽음을 앞둔 남자와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조금씩 느끼는 여자의 일상을 묘사와 관찰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영화는 죽음 앞에 놓인 남자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여자의 마음에 담긴 설렘과 부끄러움, 두려움과 분노, 사랑 이후의 환한 미소를 놓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를 정원과 다림이 함께 걷는 가을밤의 골목길로, 정원이 앉아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정원의 스쿠터가 지나가는 작은 길로 데려다 놓는다. 우리도 거기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옛 친구와 첫사랑을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삶도 죽음도 무수한 우리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다. 식사 후 정원이 깨끗이 설거지해놓은 그릇처럼, 파를 다듬고 있는 정원의 안경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이제 막 관심이 생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달리기 하는 운동장처럼, 그들의 첫 놀이공원 데이트처럼, 쉬는 날 뭘 하냐고 다림이 묻자 다림질하고 자고 그런다는 정원의 웃음처럼, 정원이 죽은 후에도 아버지가 문을 열고 닫는 사진관처럼, 영정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원처럼 모두 일상의 표정을 하고 있다. 슬픔을 말하지 않는 이 영화가 역설적으로 오래 슬픈 이유는 바로 이 사소한 일상들에 있다.    


2.

  이 영화에서 정원은 세 번 우는 것 같다. 경찰서와 자신의 방과 마루에서. 옛 친구와 술자리 끝에 다른 사람들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경찰서에 온 정원은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조용히 하라'는 말에 "내가 왜 조용히 해.", "내가 왜 조용히 해야 돼." 하며 울부짖는다.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처음으로 설움과 원망이 폭발하는 이 장면은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데 그것은 죽음 앞에 섰을 때 나 또한 정원과 같으리라는 마음 때문이다. '왜 하필 나에게'. 정원의 '내가 왜 조용히 해야 돼'라는 말은 '내가 왜 죽어야 해'라는 말로 들린다. 죽음은 그렇게 가장 큰 절망을 우리에게 드리운다.

  아버지에게 우는 소리를 들리지 않기 위해서 정원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울음을 토하듯 쏟아낸다. 이 장면은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다 끝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아버지의 짙고 긴 그림자만큼 나를 슬프게 했다.

  마지막으로 발톱을 깎다가 문득 마루에 누워 눈물을 글썽이는 정원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이렇게 혼자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음은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함께 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3.

  <슬픔의 위안>(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은 '슬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책이다. 나는 내가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던 대개의 슬픔을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이 좋지만 특별히 나는 <사소한 것들>을 여러 번 오래 읽었고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자주 이야기해주곤 한다. 이 책의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삶은 식사다. 삶은 날씨다. 소금이 엎질러진 푸른 바둑판무늬 식탁보 위에 차린 점심이며 담배 냄새다. 브리치즈이자 노란 사과이자 나루가 나무로 된 나이프다.


  삶은 이런 소소한 것들이자 매일매일 겪는 평범한 일들이다.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도널드 홀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 제인과 내게 ‘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 중에서 최고의 해는 언제였나요?’하고 물었다면 우리의 대답은 똑같이 가장 기억이 안 나는 해였을 것이다.” 도널드 홀과 제인 케니언은 평온하게 일에 몰두하는 날, 즉 C. S. 루이스가 말한 "가슴이 미어지도록 평범한 일들"로 가득 찬, 그렇게 잊기 쉬운 시간들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 이런 평범한 것들, 삶의 노란 사과들이 당신이 겪은 어떤 드라마보다 당신을 더 가슴 아프게 한다.    



4.

  오늘 아침에는 시 창작 수업이 있었고 우리는 처음 함께 시를 썼다. 이 '가슴 미어지도록 평범한 일들'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오늘 시 창작 수업, 둘이서 함께 시를 쓰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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