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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24. 2022

우린 이제 같은 시집을
함께 나누어 가졌습니다

1.

  시 창작 수강생들에게 시집을 한 권씩 선물했다. 시집 안에 짧은 손 편지를 써두었다. 종강하는 날에는 모두 다른 시집을 줄 것이니 이번에는 같은 시집을 함께 나누어 가져 보자고 말했다. 그 시집은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였다. 같은 시집을 함께 가져보는 경험은 우리를 같은 시간 속에 살게 한다. 어떤 동질감과 연대감 같은 것을 갖게 한다. 아이들은 시집을 선물 받는 것이 처음인 듯 그 시집 안에 손 편지가 있는 것은 더욱 처음인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감탄만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뭉클했다. 그때 아이들의 붉은 얼굴과 작은 탄성과 박수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손 편지에 적은 것들이 아이들 속에 오래 살아남아 있기를 기도했다. 

  이 시집이 아이들의 책장 어딘가에 꽃처럼 꽂혀 있거나 시집의 어떤 시들이 사진으로 찍혀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거나 시 한 편이 따뜻한 글씨로 옮겨져 책상 앞에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아이들이 시집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일 시 창작 시간에 나는 아이들에게 과제를 줄 예정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문자에는 이 시집의 어떤 시가 적혀 있다. 그리고 시를 낭송할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본다. 아이가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내가 전화를 한다. 아이와 나는 아무 말없이 시의 행이나 연을 번갈아 가면서 읽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만히 전화를 끊는다. 


2. 

  언젠가 같은 시집을 함께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김선우 시인의 <내 따스한 유령들>이었다. 그때도 나는 시집 안에 손 편지를 적어두었고, 시집을 읽으며 내가 밑줄 그은 것을 그대로 그 사람에게 주었다. 다음날 그 사람은 밑줄 그은 부분이 자신과 아주 비슷해서 울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간다. 같은 곳에 밑줄을 긋는 마음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떤 위로이다. 나는 시집을 여전히 꺼내어 읽어보고 있다.   


3. 

  지난 일요일 저녁, 시 창작 수업을 듣는 가은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철원쌤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누구의 기념일도 아닌 날에 아무 날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편지 써보기는 처음이에요. 사실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말 많았는데 메모장에 적어두기만 하고 용기 내지 못했어요. 시 창작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집에 와서도요. 실은 이 글도 보낼까 말까 30분 고민했어요. 제게 편지는 큰 용기가 따르는 존재라 늘 숨 크게 쉬어야지 시작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편지를 쓸 때면 누구도 주지 않은 부담 가득 안고 써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그땐 그게 저의 솔직한 마음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항상, 그런 날의 연속이다가 시 창작 수업 들으면서 비로소 솔직한 마음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됐어요. 진실함을 글에 담을 때 제가 어떻게 손 움직이는지 알게 됐어요. 아직은 고통을 완전히 드러내기가 많이 두렵고 버겁지만, 저 이제 피하지는 않아요. 지리멸렬했던 시간들도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덕분에요. 

  감사해요. 이런 마음 가질 수 있는 건 시 창작 수업이 유일한 것 같아요. 9월에 그런 얘기 하셨잖아요. 이 수업으로 오는 동안 특별한 걸음이고 싶어 계단을 오르며 그 수를 셌다고. 저도 시 창작 수업으로 향하는 발걸음 언제나 특별하게 남기고 싶어서 평소보다 발 세게 내딛으며 교실로 향해요. 수업시간에 혹시 내 눈빛이 부담스럽냐고 너희 괜찮냐고 물어보실 때, 그럴 때마다 저 세차게 고개 흔들어요. 저는 그 눈빛에서 용기 얻었어요. 저의 솔직함은 거기서 시작됐어요. 그러니까 그 눈빛 거두어가지 말아 주세요. 진심이에요. 용기이자 진실이에요.

  오늘이 아니면 이 글 다 지워버리고 헤어짐 코앞에 두고 나서야 밀린 숙제 내듯이 편지 쓸까 봐 용기 미루지 않고 보내요. 항상 감사해요. 이제 진짜 겨울이 오나 봐요! 따뜻한 옷 걸치고 만나요. 저희.


  어떤 글에는 말을 보태기 어려울 때가 있다. '숨을 크게 쉬어야 쓸 수 있는 편지'를 용기 내서 쓴 마음과 '진실함을 글에 담을 때 자신이 어떻게 손을 움직이는지 알게 되었다'는 마음과 '이제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시간들까지도 마주 볼 수 있다'는 마음과 '시 창작 수업에 특별함을 남기고 싶어 발을 세게 내딛으며 교실로 향하는' 마음과 '내 눈빛에서 용기를 얻었으며 거기에서 자신의 솔직함이 시작되었다'는 마음과 '따뜻한 옷 걸치고 만나자'는 마음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있다. 

  가은이는 나와 자신을 '저희'라고 불러주었다. '저희', 참 따뜻한 말이다. 가은이가 '저희'라고 말해주었다. 다가오는 겨울은 춥지 않을 것 같다. 가은이에게 긴 답장을 쓰고 있다. 첫눈이 오기 전에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다. 수업 시간에 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와 힘껏 끄덕이는 고개와 종이가 뚫릴 것처럼 글을 쓰는 너의 손가락과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는 너의 목소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지, 내가 슬픔과 함께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는지 길고 긴 답장을 쓰고 있다. 

  

4.

  추운 가을밤, 아이가 편지에서 다섯 번이나 말한 '용기'를 그 따뜻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힘 그대로 당신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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