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원 Oct 23. 2022

나의 단어로 시 쓰기

1.

  '지속, 사람, 나누다, 치과, 손톱, 겨울, 조명, 성당, 할머니, 부단히, 귀결되다, 2층 버스, 미화, 현실, 멈춤, 줄넘기'는 다원이의 단어이고 '영혼, 베이스, 인연, 비, 거짓말, 이유, 파도, 꿈, 낭만, 우연, 영원, 사랑, 우리, 네, 해바라기, 춥다, 솔직히, 바람, 낙엽, 가을, 사과'는 연우의 단어였다. '불행, 극복, 감정, 고독, 개선, 시간의 밀도, 오후의 졸음'은 시우의 단어이고 '청춘, 거닐다, 청명하다, 그림자, 눈송이, 창공, 보조개, 모래, 별, 너, 어수룩하다'는 서희의 단어였다.

  우리는 얼마 전에 자신의 단어로 시 쓰기를 했다. 처음에는 종이 조각에 자신과 인연이 있는 단어를 쓴다. 내가 사랑하는 단어, 무서워하는 단어, 싫어하는 단어, 두려워하는 단어, 슬퍼하는 단어, 기뻐하는 단어, 기억하는 단어, 경험한 단어....  이렇게 쓰고 나면 종이 조각을 모두 펼친다. 그리고 단어들을 이렇게 저렇게 연결해서 한 편의 시를 지어보는 것이다. 밥을 짓는 것처럼,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것처럼, 털실로 목도리를 뜨는 것처럼.

  유독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내게는 오래 머물다 가는 것들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보편적인 감동 ‘스투디움(Studium)’과 구별하여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오래 살아남아 나를 물들이며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불러온다. 그래서 아이들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특별한 이야기와 사연이 있다. 다원이에게 성당은, 연우에게 해바라기는, 시우에게 고독은, 서희에게 눈송이는 어떤 경험이었을까?

  아이들 모두가 자신의 단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까지 이 수업이 끝나지 않고 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가을의 눈부신 햇살과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연못 위에 떨어진 종이와 시를 쓰는 아이들 옆에서 나는 생각했다. 홀로 서 있는 해바라기처럼 나도 오래 거기에 서서 너희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삶의 바구니에 자신만의 단어를 꽃처럼 많이 다채롭게 담았으면 좋겠다.


2.

  힘껏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 잘 만나는 것 못지않게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만나서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쁘고 행복한 것들을 누리는 날들 못지않게 이별해야 할 때 서로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해주는 것, 각자의 삶에 시집처럼, 그릇처럼, 운동화처럼, 목도리처럼 어떤 단어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시 창작 수업이 종강하는 아이들에게 서로 다른 시집을 선물한다. 시집 어딘가에 어떤 문장을 적어 두는데 그건 아이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한 학기 동안 오래 머금고 있다 처음 꺼내놓는 것이기도 하다. 시집과 편지, 아이들과 헤어지는 날, 내 작별의 예의이다.

 

3.

  아이들은 자신의 단어를 가지고 어떤 시를 태어나게 했을까? 우리는 시를 쓴 다음 수업 시간에 그 시들을 가지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도 시에 대해 시처럼 이야기 나누었던 그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날 다경이가 그랬다. 자신의 밉고 싫고 두려운 모습이 시혁이의 시 안에서는 존재해도 될 것 같아서 괜찮았다고. 그래서 시혁이의 시에 자신은 계속 다경이의 무엇이라고 이어쓰기를 했다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되는, 존재해도 되는 공간과 사람과 시간을 만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날 다경이의 떨리는 목소리처럼 오래 기도한다. 당신이 내내 꽃처럼 행복하고 하늘처럼 자유롭기를 바란다. 당신, 행복, 자유 이것이 나의 단어인지도 모른다. 가을의 저녁이 내리고 있다. 이제 햇살처럼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당신과 나의 미래의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