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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30. 2022

'안녕 세상이여'

1.

  목요일 시 창작 시간에는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를 읽었다. 3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에서 특별히 아이를 낳다 죽은 에밀리가 무대감독에게 부탁해 과거 자신의 열두 번째 생일날로 갔다가, 공동묘지로 돌아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을 읽었다. 이 대사는 드라마 <마더>에서 '영신'(배우 이혜영)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따뜻하고 슬프고 아련한 목소리로 읽기도 한다. 가을 햇살과 함께 우수수 떨어지는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오후 두 시의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안녕 세상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던 시계도 엄마가 가꾸던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로 다려 놓은 옷과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세상이여.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얼마나 깨달을까요? 자신이 살고 있는 1분 1초를 말이에요.”


  그날 우리는 '가장 일상적인 것은 지구의 무게를 지닌다'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곱씹으며 평범한 것들의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윤희는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고, 한영이는 자신에게 지금 가장 가까운 이별은 졸업이니 졸업 전까지 학교의 모든 것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를 사랑하는 수민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소설과 모든 기록들에게 인사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했고, 다경이는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부끄러움, 미움, 어둠, 서투름, 부족함에게 따뜻하게 안녕히 있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날과 달리 아이들은 작별인사에 대한 질문에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답을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는 아이들이 이 주제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에 오래 간직하여 생각한 것들은 언제나 문장이 된다. 아이들의 대답은 그대로 옮겨 적으면 글이 될 수 있었다. 만일 작별의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헤어질 것이며 어떻게 안녕을 말할 것인지 아이들은 오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 생각에 뭉클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2.

  그날 수업에서 나는 졸업식 때도 슬프지만 아이들이 졸업하고 떠난 후 새로 맞이하는 봄이 더 슬프다고 말하며 끝내 조금 눈물을 글썽였다. 교재로 얼굴을 가렸으나 아이들은 알았을 것이다.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 금요일 오후의 햇살 아래서 너는 공을 찼고, 연못가 옆 정자에서 너는 낮잠을 잤으며, 점심시간 식당 앞으로 달려가다가 슬리퍼가 벗겨진 아이가 있었고, 네가 던진 원반이 바람을 따라 날아갈 때 달려가던 아이도 기억한다.

  그래, 늦은 저녁 2학년 4반 교실에서 얼굴을 책상에 대고 울었던 너를 기억하고, 어려운 문학 과제를 멋지게 발표하던 너를 기억한다. 봄의 교정, 아이들이 이제는 여기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퍼질 때가 있었다.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떠나고 헤어져도 사라지지 않아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남긴다.  


  그날의 글쓰기 주제를 칠판에 쓰면서 말했다. "오늘 글쓰기 주제는 모두 다 알 것 같은데요." 내가 칠판에 '나는'이라고 쓰자, 한 아이가 이어 말했다. '기억한다'

  모든 것들이 사라져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 내가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나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어떤 아이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글 쓸까요?"라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날 우리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 와서 맛있게 먹으며 글을 썼다. 그날 나는 아이들에게 평범하고 특별한 어떤 기억을 선물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와 아이스크림과 과자와 친구들과 가을 나뭇잎의 향기와 오후의 햇살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과 눈물 글썽이는 선생님과 기억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3.

  만약, 내가 세상과 당신과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어떤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그 작별 인사를 오래 생각하는 일요일 오후, 가장 평범한 것들을 그리워하며 마음은 애틋하고 슬퍼진다.

  '세상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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