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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Nov 14. 2022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던
사람들에 관하여

1. 

  11월 8일, 그날 나는 출장이 있었고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 휴강의 이유를 말하고 짧은 시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칠판에 오늘의 글쓰기 주제를 적었다. 다음 수업 시간에 오늘 쓴 글을 읽어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시를 읽고 나자 나는 갑자기 할 말이 많아졌다. 고단해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가기 미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를 소리 내어 읽자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시인 이승희의 긴 제목의 시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빛을 뿜어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헌책방>은 이렇게 시작한다. 


  헌책방 불빛은 참 착하다. 저녁 내내 그 불빛 아래에서 헌/ 책처럼 말이 없던 사내와 그 사내를 닮아 더욱더 말이 없는/ 의자가 말없음으로 서로 껴안고 우는 시간에도 가만히 그/ 등을 두드려주지 않던가.


  헌책방 불빛은 사내와 사내를 닮은 의자가 서로 껴안고 우는 시간에도 따뜻하고 착하게 그 둘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고 있다. '저녁 내내' '말없이' 울고 있으니 그들의 아픔은 길고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와 의자, 그리고 불빛은 오랜 슬픔 속에서도 서로 외롭지 않도록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해준의 말을 빌리자면 '같은 종족'이고 서래의 말을 따른다면 '사랑한다'라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의 말미에서 화자는 자신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오래도록 그대를 지우지 못하는 까닭이 그 따뜻한 불빛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면서 '내 가슴 한켠에 저 불빛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한다. 어떤 따뜻함은 지워지지 않은 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따뜻함은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의 세계에 있다. 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사람에 대해, 그 불빛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어 진다.


  나는 할머니가 갈라지고 굳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고, 엄마가 내 등굣길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내게 생일 선물로 준 따뜻한 목도리와 양말을 기억하고 있고 아이들과 함께 찍은 모든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칠판에 오늘의 글쓰기 주제를 적고 출장에 늦어 바삐 교실을 나왔다.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던 사람들에 관하여'  


2. 

  우리는 다음 시간에 수민이와 가은이와 가언이와 서희의 글을 들었다. 그날 가장 마음에 불길이 일어난 사람 한 명만 읽어보자고 했을 때 가언이는 맑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가언이가 읽자 우리는 다음, 또 그다음 사람의 글을 계속 이어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모두 따뜻한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그 따뜻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니까. 


  온통 너에게 줄게,  너는 나를 만난 일이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구름이 뭐길래. 하늘에 구름이 있다면 그런대로 해를 잠시 피해 가면 되고, 비가 내린다면 또 그런대로 꽃이 피어나겠지 생각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었나? 

  세상만사가 다 좋은 거고 예쁜 거인 나와는 다르게. 너는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면 기어코 손목을 깊이 그었다. 흐린 날이면 하란 하늘이 없어졌을 거라 믿어버리곤 했다. 언젠가 예전에 네 손목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걸 봤다. 그 손목에 사실 상처가 없다는 걸 알고도 나는 꿈에서 슬픈 얼굴의 너를 만나곤 했다. 

 구름에 대해 말하는 이제의 너는 바라보기도 힘든 깊숙한 상처를 지니고도 반창고 따위 붙이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꿈에서 너를 종종 만나곤 하는데 너는 더 이상 울거나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지도 않더라. 벌어진 상처 사이로 내가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너에게 그런 검붉음이 뭔지 알아버릴 것 같았다.

 애써 그 색을 지워내려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솜사탕 같은 구름이 있다. 벌리지도 않은 입술 사이로 감탄사가 나오는 맑디 맑은 날이 아니라면 구름은 항상 하늘에 있는 것인데.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구름도 예쁘지 않으냐고 했다. 너는 별 고민도 없이 그럼 너가 구름 할래? 하더니 아니다. 그냥 햇빛 하라며 햇빛처럼 웃어 보인다.

  네가 그렇게 나에게 보여준 햇빛은 아마도 너가 힘을 냈던 조그마한 빛들을 모두 모은 빛. 그런 거라면 그냥 너 가져도 되는데. 우리는 하늘 아래 이토록 살아갈 수 있다. 구름 아래 살아갈 수 있다. 이 하늘이 온통 너의 것이길. 내가 너에게 차근히 선물할 수 있길


  먹구름 가득한 하늘과 손목의 상처, 슬픈 얼굴과 반창고를 가진 너이지만 '네가 그렇게 나에게 보여준 햇빛은 네가 힘을 냈던 조그마한 빛들을 모두 모은 빛'이다. 너는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의 와중에도, 마음의 병이 몸의 고통을 불러온 순간에도 가까스로 간절히 힘을 내어 조그만 빛을 내었고 그것을 모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가언이는 다짐한다. 우리는 하늘과 구름 아래에서 '이토록' 살아갈 수 있고, 이 하늘은 온통 너의 것이며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천천히 하나씩 차근히 선물할 수 있을 거라고 눈물겹고 씩씩하게 다짐한다.    


3. 

  이토록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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