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원 Mar 26. 2023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낄 공간'

1.

  시창작 시간에 글쓰기의 원칙에 대해 설명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예전에는 작고 하찮았지만 지금은 특별해진 것이 있는지. 지현이가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더 헤아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할 때, 아이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현이는 자신이 할 일이 많거나 힘들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날카롭고 무심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어제, 친구가 지현이 앞에서 "아, 바나나 우유 먹고 싶다"라고 했는데 지현이는 퉁명스럽게 "그래 사다 먹어"하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는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다음날 지현이는 친구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다 주었다. 누군가에게 작고 하찮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 지현이는 친구의 바나나 우유를 이해했다.


2.

  이번 학기에도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글쓰기 노트와 메모장을 선물해 주었다. 특별한 선물이라기보다는 글쓰기의 출발을 알리는 우리만의 작고 소박한 의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올해 봄에는 조금 마음을 내어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시집을 사서 손 편지를 쓰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같은 시집을 함께 나누어 가지며 봄의 수업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이 시집이 교재도 아닌데 수업 시간마다 교실에 가지고 들어와서 책상 한쪽에 올려놓는다. 스물 두 개의 책상 위에서 봄햇살에 반짝이는 시집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이 삶에 마음을 다하고 싶어진다.

  시집을 받은 채윤이가 말했다.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요." 따뜻한 시집과 편지는 누군가에게 편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외롭고 쓸쓸한 세상에서.  


3.

  공적인 일로만 알고 지낸 분에게 공진단을 선물 받았다. 10알 정도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비닐봉지로 단단히 싸서 주셨다. 냉장 보관하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문자로 공진단의 재료와 원산지를 문자로 보내주셨다. 시간이 지나 저녁 무렵에는 다시 복용 방법과 관리방법에 대해 보내주셨다. 꼭꼭 씹어드시고 힘내시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이른 아침에 답장을 보냈다. '주신 약도, 약에 대한 설명도 따뜻해서 조금 뭉클했고 자세히 설명해 주신 덕분에 꼭 먹어야겠다는 마음도 든다'는 말과 '삶은 불확실하고 고통과 괴로움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다음을 생각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다시 문자를 주셨다. '혼자 다 끌어안지 말고 투덜거리고 성질부리고 화도 내셨으면 좋겠다'는 말과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셔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는 말도 있었다.

  나는 오래 그 문자를 바라보았다. 가장 정확히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래 나, 투덜거려도 되고 성질부려도 되고 화도 내도 되는구나. 내가 나를 아프게 하지는 말아야겠구나.


 4.

  시창작 수업 첫날이었던 3월 3일에 재이는 수업을 마치고 교장실에 와서 내게 손 편지를 주었다. 이 수업을 기다리며 쓴 편지였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선생님도 그러셨을지 궁금했습니다. 학생들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어떠셨을지, 또 맞이하는 마음은 어떠셨을지. 브런치에서 발견한 선생님의 글은 두려움과 강인함이 나란히 놓인 다짐인 듯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어딘가 편찮으신 것 같았지만, 동시에 풍파를 견디어 이긴 단단한 바위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안녕함 또는 그렇지 않음으로 답해야 하는 인삿말 그 너머가 필요해요. 그래서 시창작 수업의 처음을 맞이하는 오늘 저는 떨림, 또 영광스러움과 함께 합니다. 이번 학기에는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낄 공간이 주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고맙습니다. 조금씩의 삶을 서로 머금고 써낼 기회가 있기를 조그맣게 기대해요. 자상한 봄날들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의 '떨림'과 '영광'을 위해,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견디고 버티고 기다려야 하는지 오래 생각하는 3월이었다.


  그사이 봄비가 내렸으며 진달래가 피었고 아이들은 내게 그 꽃으로 만든 화전을 가져다주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밥과 꽃, 빵과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