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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Apr 28. 2023

가치에 대하여

1.

  고3 아이가 저녁 무렵에 교장실을 찾아왔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은 친구였다. 아이의 삶의 이력을 보면 압도적으로 문학과 철학의 경험이 많았다. 하지만 아이는 의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 보건 의료 정책이 부족하다 했고 특히 자신은 여성의 의료와 보건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의학이든 궁극적으로 자신은 사회와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내는 일을 하고 싶은 거라고 했다.

  아이가 의학과 보건의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눈동자는 초롱초롱해졌고 볼은 빨갛게 상기되었으며 말은 빨라지고 목소리는 높아졌다. 나는 마침 아이가 관심 있어하는 주제의 책이 교장실에 있길래 꺼내어 주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도 이야기해 주었던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라는 책이었다.   


2.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나는 그 일을 꼭 해야만 해", "내가 좋아하는 일은 그런 것이야" 아이는 내 앞에서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였다. 가치는 매일매일의 수모와 모욕, 생활의 남루함을 견디고 버티게 해 준다.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펼칠 기회와 때를 기다릴 수 있다. 시간들을 버티고 견딜 있다. '그래 내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고 있지만 반드시 좋은 기회가 올 것이다' 가치의 힘은 때로 그렇게 강하다.

  아이가 가고 나서 한참 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나의 가치는 무엇이었나? 나의 욕구와 관심과 갈망은 무엇이었나?      


3.

  진로란 직업을 잘 찾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마다 자신의 진로와 직업이 어딘가에 고정된 형태로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아이들과 부모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지금 내가 선택한 진로가 나에게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선택한 진로가 정말 나의 진로가 아니라면 이 시간은 너무 무의미한 거 아닌가?'

  진로란 오히려 강렬한 배움의 체험 속에 있다. ‘배우고 싶다’,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아이들로 하여금 오늘의 배움과 그다음 날의 배움을 만들어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아이의 삶의 이력과 진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다.

  

4.

  이렇게 말하고 나면 어른들은 '좋은 가치'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거나 '가치교육'이라는 주제로 또 다른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런 교육이 안 되어서 아이들이 문제라고 말하거나 미래사회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라고 말하면서 당장 교육과정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아이들이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어른들의 숫자만큼 많을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가지게 된 가치를 의식하고 알아차리고 감각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진 사람인지 이해하고, 어떤 경험 때문에 내가 그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지 깨닫게 됨으로써 '나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길러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또 다른 가치들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올 것이다.   


5.

  요즘 나는 뜨겁고 높고 빛나는 삶이 아니라 작고 소박하고 평범한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매일매일의 일상, 나의 일과 관계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기쁨을 누리고 싶다. 그 행복이 내일의 삶을 살아갈 작은 에너지가 되어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신념과 꿈과 용기가 아니라 따뜻한 봄바람과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이 있었으면 좋겠다. 11시에 시작할 금요일의 시창작 수업, 오늘의 시 쓰기에 쓸 색종이를 가위로 예쁘게 자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색종이에 적는 '나의 단어들'이 모여 '나의 시'가 되는 과정을 곁에서 따뜻한 눈동자로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급식실 밥 선생님들에게 선물할 빵이 맛있었으면 좋겠고, 어제 생신편지를 드린 당직 선생님이 오늘 고맙다고 인사해 주신 보답으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밤이 되면 오래 만나지 못한 그리운 사람에게 다정한 손 편지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안했던 일과 고마웠던 일, 올리브나무가 훌쩍 자란 것과 어제 별이 참 밝았다는 것과 이제 인공위성과 별을 잘 구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이다. 아주 조금만 더 당신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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