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어느 날 작은 외삼촌네로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삼촌네 2층 집엔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 큰 외삼촌네, 이모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이 박작박작하게 모여있었다.
명절이 아니었으니, 아마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중 한 분의 생신이었나 보다.
오랜만에 모인 어른들은 쉴 틈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하느라 분주했고, 이런 자식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한 마디씩 거드는 외할머니 또한 들떠 보였다.
한 어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옆에 앉은 친척 어른의 귀로 들어가고, 그 해석에 따라 덤덤해지다가 인상을 쓰다가 미소를 짓다가 또 어느 순간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관찰카메라인 양 지켜보았다.
달뜬 어른의 말이 생생하게 들렸고, 엿듣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그러던 중 외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니는 아 어마이(애 엄마)가 무슨 짧은 바지를 입었노?"
"왜! 이뿌제?"
"이뿌기는, 아 어마이(애 엄마)가 무릎도 다 내놓고"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입어보노."
"아이고! 챙피시러버라."
"뭐가 챙피시럽노. 더 나이 들기 전에 입어야지."
외할머니의 애정이 담긴 질타와 형제들 중 막내인 이모의 티키타카가 이어졌고,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그날의 지루함을 잊게 해 주었다.
오래 기억되는 선명한 풍경.
그날의 이모는 자신의 무릎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금 나의 무릎보다 그때 이모의 무릎은 훨씬 어렸을 테니까.
작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무릎이 늙어간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둘째를 데리러 가려고 반바지를 입다 추켜올려진 바지 아래로 훤히 드러난 무릎이 보였다. 지나온 시간의 길이만큼 탄력을 잃은 허벅살은 무릎뼈 위로 두세 줄의 주름을 만들어 놓았다.
문득 생각했다. '아! 무릎도 나이가 드는구나.'
거울에 비치는 모습만 보아왔으니 지금껏 눈여겨봤던 것은 얼굴뿐이었나 보다. 눈가, 입가, 미간에만 쏠려있던 시선이 이제야 무릎을 발견했다. 그동안 살피지 못한 무릎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곳 하나 다른 시간을 지나온 게 아닐진대, 나이 든 무릎을 도통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집통이 생겼다.
무릎은 원래 주름져있으니까.
그곳은 어리거나, 나이가 들거나 매 한 가지로 주름이 있어야 할 부분이니까.
늙어감을 가늠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이니까.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되고, 하루씩 살아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내 몸 어딘가에 아직은 젊다고 우길 만한 곳이 남아있을까?'
그런 날이 오면 다시 그날의 무릎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훌쩍 지나온 시간만큼 늘어진 무릎을. 그리고 작년 여름의 젊었던 무릎을.
내일이면 6월이고, 타는 듯한 여름은 어김없이 시작될 것이다.
올여름 나는 나이 든 무릎을 염려하지 않고 반바지를 입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