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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할배 Feb 04. 2022

공포의 교실

추억이 아름다운가요 #2

공부는 물론 못했지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학교에 가서 매 맞지 않고 돌아오는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준비물 안 가져왔다고 맞고, 숙제 안 해 왔다고 맞고, 가르친 거 모른다고 맞고, 때로는 어제 결석한 거, 오늘 지각한 거 때문에 맞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개뿔 공부는 무슨 공부겠습니까? 내 기억 속의 많은 선생님이 악한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런 체벌의 기억 때문이기도 합니다.     


느닷없이 새해맞이 글에 공부 얘기, 매 맞은 얘기가 나온 것은 1편에서 김×× 선생님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매 맞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고, 맞음에 대해 나도 수긍을 했는데, 이건 너무 공포스러웠고 너무 억울해서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일제고사라는 시험제도가 있었답니다. 70~80명 되는 아동들이 교실에서 복작거리던 때이니, 눈동자만 잘못 움직여도 옆자리 시험지가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특정한 날을 잡아 3학년 이상 모든 학생들에게 연필과 책받침과 지우개를 지참하고 운동장에 학년별 반별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양팔 간격으로 줄을 맞춘 상태에서 쭈그리고 앉아 문제지를 받아 하루 종일 시험을 봤습니다.     


책받침도 없는 상태에서 손바닥으로 모래를 쓸어내고 뭉툭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 눌러 쓴 내 시험지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것이 정기고사이고 통지표에는 이 시험 성적을 바탕으로 '수우미양가'가 쓰여지게 되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일제고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채점이 완료될 때쯤이면 담임선생님은 무시무시한 지시를 하십니다. 내일은 다들 자신이 맞을 매를 준비해 오라는 것입니다. 재질은 버드나무이고, 굵기와 길이까지 정해 줍니다. 매를 맞을 대상  학생이 이 준비물을 가져가지 않으면 가중 체벌을 받기 때문에, 저 맞을 매를 감히 준비 안 하는 간 큰 애들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1교시부터 4교시까지 한 시간도 빼지 않고 아이들에게 매질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대부분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 어디를 그렇게 때릴 수 있었을까요? 담임은 분명 새디스트였다고 확신합니다.    


미술이었는지 자연이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시험 성적을 불러 주기 전에 담임이 말했습니다. 이름을 안 쓴 놈이 한 놈 있는데 지금 자수하면 용서하지만 나중에 밝혀지면 혼날 줄 알라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사실 답안지에 자신이 이름을 썼는지 안 썼는지를 시험 후에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누구도 일어나는 사람 없었고 선생님은 한 명씩 점수를 불러주기 시작했습니다.     


70명이 넘는 애들의 성적을 불러주며 때리고, 또 불러주고 때리고 하며 시험지를 나누어 줬습니다. 그런 의식(?)이 다 끝나고 선생님은 채점된 시험지를 못 받은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고 나 혼자만이 나갔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오줌을 쌀 것 같았습니다.     


구멍 숭숭 뚫린 것이 틀림없이 내 시험지가 맞긴 했는데 득점은 25점이었습니다. 이름 안 쓴 시험지의 주인을 확인한 담임은 공포에 떨고 있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점수가 25점이니 일곱 대, 이름 안 쓴 죄 세 대, 전부 열 대 맞는다. 걸상 위에 올라서."


60점 이하는 5점에 한 대씩입니다. 그 전 시간에도 계속 맞았었는데, 그날 난 눈물 콧물 흘리며 콧물이 풍선을 만들도록 내가 가져간 막대기로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예 오줌을 싸고야 말았습니다. 정말 힘든 날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 기억이 이토록 오래 남은 것은 채점의 부당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몇 번 문항인지는 모르지만 '무지개의 일곱 빛깔을 쓰라.'라는 문제였습니다. 빛깔마다 5점씩 배점 되었었구요. 선생님은 '빨-주-노-초-파-남-보'로 가르쳤는데, 나는 왜 '보-남-파-초-노-주-빨'로 외웠을까요? 가운데의 초록만 맞고 나머지는 틀린 것으로 채점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학생을 시켜서 채점했나 봅니다. 채점지를 받고 난 다음 바로 이것을 알았지만 정정을 요구하기에는 담임이 너무 무서웠고 나는 겁쟁이였습니다.    


 

<< 난 선생님이라 하여 무조건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악한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당시의 많은 선생님들은 은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슬리퍼를 벗어 내 따귀를 때렸던 미술 선생이나, 그렇게 아끼던 하모니카를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불었다는 이유로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았던 생물 선생보다 당신은 훨씬 질적으로 떨어진 선생이었습니다. 당신이 폭력을 가했던 당신의 제자가 얼마만한 공포에 휩싸여 있는지 헤아리지 못한 당신은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선생님 최##과 함께 김×× 선생님, 당신은 가장 선생답지 못한 선생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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