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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할배 Feb 06. 2022

우연의 강제적 성격

추억이 아름다운가요 #5

1964년 2월이었던가요.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면서 기대와 우려가 반반이었습니다. 이제 잘 되면 지긋지긋한 학교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결과에는 필연적으로 실망한, 그리고 한심스러워할 집 식구들의 시선이 따른다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웅기중기 모여든 사람들 앞에 붙여진 두루마리 합격자 명단에 불행히도(?) 내 이름이 있었습니다. 함께 간 마을 친구도 합격이었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또 나는 학교에 가야 하고 어쩌면 또 선생들로부터 매일 매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걱정스럽게 돌아오는 길에 손쉴재에서 친구와 함께 아직 눈이 덜 녹은 양지바른 산비알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담배도 안 피우시면서 담배 내기 마작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사랑방 윗목에 늘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훔쳐서 주머니에 넣어둔 '파랑새' 담배 한 갑, 낙방하면 피우려던 담배 한 갑을 둘이서 10개비 씩 나누어 쉬지 않고 다 피우고야 산을 내려왔습니다. 성냥골이 하나밖에 없어, 이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노랗고 입은 깔깔하고 입 속에 들어간 담배 가루는 뱉어내도 혀에 자꾸만 느껴졌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구도 축하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찾아와 예언까지 하셨는데, 그런 내가 합격을 했으니까요. 나는 찍었고, 찍은 것의 상당 부분은 답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더 공포스러운 우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답안지를 남이 보여 준다면 외면할 정도로 양심적이진 않지만, 일부러 다른 학생의 답안을 커닝할 정도로 배짱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와 첫 시험 결과가 통지표로 배부되는 날, 난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분자 숫자 앞에 5는 없었습니다. 내 중간고사 학급 석차는 7/63이었습니다.    


57등이 아니라 7등이었다는 것입니다. 커닝을 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어떤 것이 답일까요?'라며 찍은 것밖에 없는데 그것이 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뻔뻔스럽게도 나는 초등학교로 뛰어갔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던 담임에게 반항을 담은 자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1학년 오후반을 맡으셨나 봅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하나 둘, 셋, 넷 하며 돌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다짜고짜 통지표를 내밀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잘했구나!"라며 칭찬을 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이 기쁨- 세상에, 세상에!!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이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러나 통지표를 부모님께 보여 드렸을 때는 달랐습니다. 집에서는 이와 관련된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꼴찌일 때 그냥 넘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학기말고사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나를 짓눌렀습니다. 우연이 몇 번이고 계속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성적이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보다 더 큰 걱정은,

"너 전에 커닝했지?"라고 할 것 같은 선생님의 시선이 무서웠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로 인해 매를 맞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무서워서 시험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 안 되는 것은 무조건 외웠습니다. 다행스럽게 외우는 머리는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학기말고사는 25등 정도였습니다. 52등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놀란 것이 아니라 기뻤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내 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적 향상(?)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유전적 요인입니다. 이 부분은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화 실조로 인해, 중1 때 실시한 지능검사에서 아이큐가 75로 나오긴 했지만(중3 때 확인. 동급생 250명 중 꼴찌에서 세 번째), 스스로 머리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고1 때 지능지수 검사 결과는 이보다는 좀 높아졌으니까요.    


두 번째 요인은 동급생들입니다. 나도 공부 안 했지만 이들도 지독히 안 했습니다. 시험이 내일이라 해도 시험 준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낮 동안 농사 일로 힘들었으니, 책을 볼 수 없었겠지요.    

내가 약간의 시험공부로 25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들의 공부에 대한 외면이 가장 큰 요인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세 번째는 앞에서 이미 얘기했습니다만, 겁 많고 소심한 내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닥칠지도 모를 끔찍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그보다는 덜 무서운 공부를 선택하게 했다고 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때부터는 시험이 닥치면 시험공부를 했고, 성적은 그에 따라 향상되어 중3 때에 학급석차는 10등 이내로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두 번의 우연은 내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강제로 바꾸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해 준 우연, 정말 고마워해야겠지요.        


        

《세상의 많은 일들은 인연보다는 '우연'이 만들어 내나 봅니다. 어쩌다 닥친 우연은 그 사람의 상황이나 성격과 어울려 플러스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갈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닥친 두 번의 우연은 60년대 시골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겁 많고 소심한 내 성격에 어울려 한 인간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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