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이룬 것들은 원형의 흔적을 남기며 존재하는 것 같지만 원형을 이룬 것들은 미세하게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며 사라진다. 표면적으로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 미세한 틈과 균열이 생기면서 차츰 소멸되는 과정으로 간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 샀다. 집안을 둘러봤다. 버릴 것이 없다. 다시 찾는다. 내 손에 두 개의 물건이 재활용 분리 박스에 들어갔다. 무엇이든 소멸한다. 사물의 원형은 영원하지 않다. 존재의 각질조차 그처럼 떨어져 원형을 유지하지 않는 수동태다.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조차 사라진다. 모든 사물은 항상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도 처음의 원형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연도 생성 소멸의 과정을 거치면서 표면적으로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아도 어느 날 원형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집 앞에 느티나무는 처음 그 느티나무가 아니다. 이제 봄이 올 거면, 나뭇가지에 움틀 새순조차 작년의 그 새순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래의 사물을 변형틀에 맞추어 조금 다른 것으로 바꿀, 본래의 원형은 이미 사라진 후이다.
나를 이루는 것들이 보이지 않게 소멸해 가는 것. 덩어리가 아닌 아주 미세한 것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
우리의 생은 소멸의 과정을 걷는다. 다만 생과 사를 이루는 단위의 세포분열 속도와 손상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라. 어제의 모습을 이탈한 상태의 오늘의 그들 모습을 바라본다. 그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일지라도 소멸을 향해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서러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대로 유한하다는 것을 일상의 햇살처럼 피부로 느끼듯 알고 있다. 나는 비움의 낭만과 소멸의 허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우지 못하기에 납덩어리 같을 내 생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갈 것이고, 생성(획득)만 바라보기에 조금씩 흔적을 잃어가는 존재의 소중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물건들이 조금씩 닳아 애달파하는 것처럼, 내가 닳아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닳아가는, 지극히 미세한 것들을 생각할 때 나는 적어도 하루를 풍성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억울함, 고통스러움, 회한적 눈물까지 떨군 지난 일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 내가 늘 사유해야 함은, 존재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의 안타까움이다. 부서져 날아가는 미세한 존재의 흔적들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는 집안에 무겁고 값비싼 가구들을 들여놓지 않는다. 내가 마지막까지 혼자 버릴 수 있는 것들을 주로 배치한다. 그렇다고 그것의 일상이 고독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의 고독과 허무는 그것과 결이 다르다. 닳아가고 있는 가구들 앞에 서서, 나는 사랑하는 그들을 생각한다.
조금씩 사라져 가는 존재의 움직임.
최근에 어느 대중 가수가 노래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모습은 주홍빛 지는 노을보다 더 아름다웠던 움직임을 기억한다.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어찌할 수 없는, 그 깊은 고요한 아름다움 속에 흘러가는 존재의 허무를 보았다. 우리의 生이란 강물에 흘러내려가고 있는 붉은 꽃잎과도 같다. 꽃잎은 아름답지만 넓은 바다를 향해 사라져 간다. 하루에도 보이지 않게 소멸해 가는 유한한 삶에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인가를, 닳아가고 있는 가구 앞에 다시 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