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by sally

한 걸음씩 걸어가지 못했던 것.

시선에 담지 못했던 것.

그리고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


어쩌면 나는 도시의 삶을 불평하면서 그 뒤편으로 화려한 삶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한 걸음 멈추면 보이는 것들, 어깨를 잠시 스치고 지나간 것들, 난 그러한 것들을 화려함 속에 숨겨두고 지나쳐왔다. 내게서 떠나간 사랑이라는 이름까지 난 흘려보냈다. 최근에 신경계 과각성으로 힘겨웠던 시간들을 보내면서 여행길에 올랐다.


공간.

그리웠다.

하늘.

구름.

바다.

해변.

산등성이.

호수.

나무.

.


화려한 도시를 벗어나 고즈넉한 풍경에 서있는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인내력을 시험했던 현실로부터 자유를 누리길 원했다. 고단한 하루를 지나 유일하게 현실을 분리할 수 있는 수면조차 내겐 힘겨웠다. 지속되었던 신경의 긴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수면유도 음악을 따라 잠들기에도 나는 뒤척였다. 끝나지 않을 일들은 내 삶의 브레이크 장치조차 없었다.


퇴근 후 기차 안, 건너편 지쳐있는 사람들 얼굴이 곧 내 모습이었음을 난 알고 있었을까.



느 날, 나는 봄빛이 쏟아질 때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어느 한 공간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 도착해서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 둘 시선에 담았다. 경쾌한 발걸음 뒤로 봄이 차분하게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멈춰 섰을 때 나는 시골 마을 꽃집 앞에 섰다.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워 손을 뻗었다. 부드럽다. 어여쁘다. 나는 중얼거리며 시선 속 오직 또렷하게 그녀의 풍경만을 담았다.


노란빛

분홍빛

주홍빛

붉은빛

흰빛



좁은 골목길. 구불한 골목길. 그 사이사이를 걸어본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봄빛이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어 왔다. 손을 펼쳐 창을 만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흔들렸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서서히 봄의 눈빛으로 공간을 바라본다. 까만 동공은 열리고 그 안으로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침실보다 더 아늑한 공간에 누워본다. 눈이 깜빡거리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안개꽃에 쌓인 장미꽃 몇 송이와 작은 화분을 손에 들고 숙소로 향했다.



풍경.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요동치지 않고 잠잠히 나를 바라보는 바다가 있다. 우직한 나무 한 그루가 넓은 바다를 지킨다. 빛의 파편들이 바다에 쏟아지면서 윤슬이 물결 따라 아름답게 반짝이며 움직였다. 작은 섬이 오뚝하니 서있다. 언어가 멈추고 나는 시선으로만 봄을 훑어내려갔다.



소리.

아기새들이 떼를 지어 나뭇잎 사이로 날아다니며 지저귄다. 바람 부는 소리가 피부로 스며든다. 붉은 꽃들이 아웅다웅하며 꽃잎을 활짝 열어젖힌다. 통통배가 햇살을 안고 물결을 가르며 지난다.



시선.

숙소에 앉아 책을 펼쳤다. 글이 들어온다. 나는 글을 해석한다. 한동안 글을 읽을 수 없었고 에세이 정도의 글쓰기도 힘겨웠다. 그동안 단문 형태로만 글을 나열했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로 길을 걸었다. 붉은 동백꽃잎이 떨어져 있다. 꽃잎 지고 말 인생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나는 한 걸음씩 동백꽃 앞으로 걸어간다.

멈춘다.

커다란 꽃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린다.



* 여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