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by sally

생명은 호흡하고 있어도 촛점없는 눈동자는 구름의 경계가 없는 흐릿한 날씨의 하늘빛과도 같았다. 세계는 빛에 의해 움직였지만 길을 안내한 자의 눈썹은 이끼처럼 초록색을 띄었고, 얼굴은 어두운 우물안에서 나온 개구리처럼 축축하고 칙칙해 보였다. 그의 산책길로 따라갔을 땐 마침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왔고, 우린 단풍잎을 길게 늘어뜨린 고목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고요히 지평선을 바라보니 주홍빛 노을은 이미 사라지고 사람사는 땅엔 어둠만이 짙게 깔렸다. 그 어둠은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 이르기를 원했고, 나는 그 안내자와 함께 조금씩, 깊은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숨을 쉬면 소리가 들릴 줄 알았어. 생명을 가진 자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어.

좁고 구불한 골목길, 봄햇살이 가득 내려앉았을 때 저만치서 그 사람이 날 향해 이름을 불러주는 것 같았어. 하지만 들리지 않았어. 한 걸음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의 입모양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던 거야. 발길을 되돌려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어. 오랜 시간이 지났어. 그는 내게 작은 손편지 하나만을 우편으로 부치고 흔적 없이 사라졌어. 널 불렀어, 널 불렀던 거야. 사랑은 내 귀에 들리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어.



어느 날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어.

겨울끝 새순이 움트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이른 봄 새벽녘 피어나는 봄꽃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여름끝 새하얗게 들판에 내려앉은 메밀꽃 터지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어.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어. 나는 그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질렀으나 목소리는 공포스럽게 또는 아주 희미하게 내 입에서만 맴돌았어.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는 심연의 바닷속으로 물거품 되어 가라앉아 버렸어.





# 신경과 병동


늦은 오후, 유월 하순의 햇살이 병실 창가에 쏟아져내렸다.

입원실에서 내려다 본 탄천은 세찬 여름비가 내린 후 물이 불어나 있었고, 고개를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은 솜사탕을 풀어헤친 듯 하더니 곧 몽실몽실 흰구름이 드넓은 파란 초원에 눈꽃처럼 피어났다.

그녀는 왼손에 꽂힌 링거바늘이 따가워 오른손으로 볼록 튀어나온 바늘을 살살 문질렀다. 입원한지도 벌써 5일이나 지났다. 여전히 얼굴의 감각이상과 얼굴 안쪽으로 부풀어오른 혈관이 신경을 압박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다리와 발바닥은 감각이 떨어져 공중에 부양하듯 걸었고, 어지럼증이 심해 걷는 게 다소 불안정했다. MRI 검사 결과로는 이상은 없고, 단지 병명은 피부이상으로 나왔다.


그녀는 한달 전, 독감 바이러스에 연거푸 걸렸다.

눈에서 누런 고름이 하염없이 쏟아져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얼굴 감각은 거의 없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면서 다양한 검사를 받았으나 결과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증상만큼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고막 뒤 중이에서 혈관이 터지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강한 공포가 도둑방망이처럼 급습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 세상은 시끌벅적 돌아가는데 그녀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사물의 고요한 움직임만 시야에 보일 뿐이었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공포스러운 핵이 바로 앞에서 터지기 전과도 같았다.


땅의 사람들이 잠든 고요한 새벽녘, 그녀는 얼굴 안쪽이 부어 입으로 호흡을 견디면서 잠들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 푸른빛을 내뿜는 새벽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들리지 않는 게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몰라. 머리는 아득하고 축축하기만 해. 숨을 쉴 수가 없어. 숨구멍은 바늘구멍 같아. 무섭고 공포스러워.


그럴 때 절망이란 자는, 친절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의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 뒤로도 그는 친밀하게 다가왔고, 익숙하게 그녀 곁을 맴돌았다. 아침이슬을 태양이 훔쳐가기 전에, 그는 단두대 앞을 지나는 산책길을 고요히, 그녀에게 매일 안내했다.


절망이란 것, 다가갈 수록 매력적이었잖아. 그들의 모임은 언제나 신사적이고 친절하게 그녀를 안내했어. 처음에는 혼자 다가왔다가, 그녀가 시들해지자 무리를 끌어안고 그녀 곁을 에워쌌어. 그들이 탄성을 지르자 그녀는 즐거워했어. 세상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들의 말소리는 부드러웠고, 세밀했고, 다정한 목소리였거든.

"세상의 꽃들이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어도 난 들을 수 없었어. 하지만 그들이 말해주었던 사랑은 너무나 잘 들렸어. 죽음보다 깊은 잠에 이를 수 있도록 그들이 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어."

그녀는 혼잣말을 되뇌였고, 그 무리들을 따라 구름이 낮게 머문 절벽 끝, 맨발로 아슬하게 서 있다.





나는 2년 전부터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형제들이 모두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갈 생각까지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의 모습을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었으나 난, 독감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공간의 제약이 생겼다.

얼굴 감각 이상과 귀 출혈 이후, 나는 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는 죽을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한 때 절망이 쓰나미처럼 덮쳤을 때, 죽을 수만 있다면 그 공포스러운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동안 앉아서 잠을 자야 했던 시간, 처방받은 액체의 약들을 한 봉지에 가득 담고, 버스 창가에 기대어 절망했다. 들리지 않는 세상은 이미 나와 결별했다. 그 이후로 운전대를 잡을 수도 없게 되었고, 귀로 들으며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내 일도 고통스러웠다. 난 일상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난 세상으로부터 도망나왔고, 이후 절망이란 자와 손을 잡고 마주보았다.


여름날 지렁이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말라가는 것처럼, 난 절망이란 자 앞에서 몸서리치며 바싹 야위어갔다. 살기 위해,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루에 한 개씩 물감을 샀던 것은, 그 물감 하나가 내겐 한줄기 희망 같은 거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굴 신경을 악화시켰고 나는 포기했다. 난 결국 절망의 막다른 골목길에 이르렀고, 대지 위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절망의 언덕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소유하지 못했기에 열정적인 존재의 혁명은 어둡고 페스트균이 득실거리는 음침한 쥐구멍에서 시작되었어. 그러나 악성 바이러스는 부유한 자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쥐들의 먹잇감을 주워먹게 함으로써 우리의 이념은 새드엔딩을 맞이했잖아. 정신의 혁명은 위대하였고 창대하였다고, 스스로 위안했을지라도 파도의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질 서러운 거품같은 것으로 마감했을 뿐이야. 너는 이미 알았잖아. 네가 행했던 여린 몸짓은 거짓된 멸망과 파멸의 춤사위였다고.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 그건 곧 추잡한 염문 따위로 전락할 것이고, 존재와 정신의 혁명은 결국 나눌 수 없는 물과 기름의 이분법적인 섞임이었을 뿐이야. 너는 그저 물에 뜬 기름을 수저로 걷어내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럼 난 결국 무엇을 원했던 것인가. 아, 그것은 자유였어. 이념은 곧 나의 삶에 대한 자유의 외침이었어. 그래, 이것은 곧 에덴동산의 자유였고 억압했던 우리 청춘의 이데올로기는 언어의 유희에 불과했던거야."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이전에 내 안에서 늘 꿈틀거렸으나 이념의 거대한 장벽으로부터 막혀있었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한 것은, 공포스러웠던 그 시간들을 넘어서기 위한, 삶의 절망으로부터 자유의 성지를 찾아가기 위한 처절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난 호흡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명은 호흡이었고 삶이었다. 글은 내게 생명의 호흡처럼 다가왔다.

나는 절망으로 부터 구속된 삶의 생명과 죽음으로부터, 그 고통과 상처로부터 해방구를 찾아나선다. 우린 고통스런 절망의 창살을 뚫고 에덴동산의 자유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나도 그럴 것이다. 내가 글을 써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절망이라는 속박된 삶에서 자유를 향하여 떠나는 순례자의 길을 찾아 나선 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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