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암스 비치
이른 아침, 눈을 뜨니 길게 늘어뜨린 흰색의 시폰 커튼이 선풍기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방 창문 너머로 녹음이 짙어가는 칠월의 산등성이와 그 위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펼쳐져 있다. 무언가 꿈속에서 쫓기는 듯한 상황 속에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산 자의 육체는 아득한 어느 공간으로부터 달려 나왔고, 세상으로 나온 존재는 육체를 구성한 퀭한 눈으로 이른 아침의 태양과 칠월의 풍경을, 바라본다. 아니, 그것은 바라본 것이 아니라 풍경들이 내 눈동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는 보려 하지 않아도 보았다.
폭염으로 밤새 거실 에어컨을 틀어놓고 방에는 높은 스탠드형 선풍기를 실바람처럼 틀어놓고 머리를 뉘이면 내 몸은 고요히 산속 깊은 곳,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발을 담근 채, 그곳에 있는 듯 스르륵 잠이 든다. 하루의 일상, 칠월의 폭염, 이 모든 풍경들은 곧 나에게 지나갈 선물 같은 아득한 그리움이다.
호주에서 이방인처럼 살았던 시절, 그때 시드니의 여름 42도는 내가 겪었던 가장 높은 온도였다. 하지만 여기 그리운 땅, 내 조국 땅에서 그와 같은 열기를 느끼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다. 나는 호주에서도 선크림 하나 바르지 않고 맨얼굴로 넘실거리는 바닷가 앞에서 한참을 친구와 앉아 있었고, 그러다 배가 고프면 감자튀김을 먹었다. 난 여름의 태양을 내 몸 있는 그대로 즐기고 싶어 했다.
호주의 여름, 이곳이 칠월이면 그곳은 1월 정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호주 여름, 친구와 난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네 마당 한가운데서 배드민턴을 쳤다. 여자 둘이 이른 아침부터 못 치는 공을 겨우 넘기며 깔깔거리다 보면 어느새 등이 멋쩍어 보일 때가 있다. 잠을 깬 동네 사람들이 각각 베란다로 나와서 우리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나름 우린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려던 그 친구와 나의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배드민턴 짝꿍처럼 늘 단짝이 되어 호주 거리를 누볐다. 그 친구는 시티에서 IT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친구(이하 곰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곰 인형을 좋아했다)와 하얀 모래로 유명한 하이암스 비치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도 호주 운전 면허가 있었지만 곰둘은 운전을 정말 잘했다. 나와 다르게 그녀는 기계적인 모든 것들에 능통할 정도였다. 가끔은, 넌 남자로 태어났으면 성공했을 거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성향은 그럴지 몰라도, 가끔 퇴근하고 시티에서 둘이 건조하게 맥주를 홀짝 마시다가 멋있는 남자가 지나가면 곰둘은 그 짧은 커트머리를 귀로 넘기면서 예쁜 척했다. 난 곰둘의 다양한 그런 모습이 좋았고, 그런 그녀가 가끔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이암스 비치는 집에서 보통 서너 시간을 차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운전대는 당연히 곰둘이 잡았다. 집에서 출발할 때,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어딜 돌아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곰둘은 쉬는 날이면 무조건 나가야 했다. 안 그럼 하루 종일 곰둘의 짜증을 받아줘야 했다. 하이암스 비치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해변가에 앉아 낙서도 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그때만큼은 인적이 드문 탓에 스스로 있는 자연의 경관은 장엄할 정도로 무섭기까지 했다.
곰둘은 내게 하루 숙박을 요구했고, 나는 까칠한 탓에 내 침대로 돌아가길 원했다. 평소 지기 싫어하는 곰둘이 졌다. 나도 은근 고집스러움을 버리지 못할 때가 있다. 돌아가는 길도 운전대는 곰둘 몫이었다. 나는 어느새 졸음이 오기 시작했고, 곰둘도 졸리기 시작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너 혼자만 편하게 잠을 자냐. 아 미안. 나는 졸음을 겨우 쫓고, 그녈 위해(아니 그녀의 잠을 깨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난 노래를 못한다. 음정도 못 맞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청 높여 노래를 불러줬다. 노래 제목은, '저 푸른 초원 위에(님과 함께)'였다. 오고 가는 길에 보니 저 푸른 초원에 방목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기에 그랬다. 야, 너 노랫소리 들으니까 귀곡산장에 와 있는 것 같아. 하면서도 곰둘은 내 노래조차 고마워했다. 하지만 내 노랫소리는 자꾸만 기어들어갔다.
다시 곰둘이 화를 낸다. 나는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반복하고 졸고 반복하고 졸고.
그렇게 그녀와 난 집에 당일 날 도착했고, 다음 날 곰둘의 짜증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리나케 인형가게로 달려가 커다란 곰 인형을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칠월의 풍경은,
이른 아침 내 잠을 깨었고,
호주의 42도, 그 여름날 뜨거운 꽃향기가 동네골목을 휩쓸던 날을 생각했고,
곰둘과 배드민턴을 치며 동네사람들 잠을 다 깨우면서까지 깔깔거렸던 날을 생각했고,
하이암스 비치에서 돌아오는 길, 목청 높여 저 푸른 초원 위에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게 커다란 곰인형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스스로 느꼈다.
칠월의 풍경은,
내 안에 기억된 저장고에서 하나 둘 꺼내어 아름답게 채색된 풍경화를, 지금 내 방 어느 벽면에 걸어둘까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