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은 전설 속 까마귀

호주, 그 달콤한 날들의 기억

by sally

내가 이방인으로 고독하게 살았던 호주는 아름다운 환경을 가진 땅이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원시림에 가까운 자연의 향기를 감각적이고 낭만적으로 충분히 만끽했었던 시간이었다.

오래전, 호주에 처음 살았던 동네가 시티에서 조금 벗어난 기찻길 옆이었는데 아담한 시골 읍내처럼 정겹고, 감미로운 연인의 꽃향기가 그 땅, 그곳에 있었다.

집 앞을 나서면 철로길을 끼고 청회색 나무들이(아마도 유칼립투스가 아니었을까) 줄지어 숲을 이루고 있었고, 기차역 인도 끄트머리에는 그 동네 유일하게 회색빛 공중전화가 유리박스 안에 외롭게 놓여 있었다. 가끔씩 그 전화기 앞에서 이방인들이 각기 삶의 슬픈 표정을 지으며 국제전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기차역 근처에 살다 보니, 안내방송이 규칙적으로 스피커를 따라 흥겹게 울렸는데 지금 돌아와 기억해 보면(현관문을 열면 항상 그 소리가 들렸었다) 아직도 입에서 맴돌 정도로(맹모지삼천지교처럼), 문득 고향의 소리처럼 그 시간이 아득하게 그리워진다.(The train to hornsby arriving on platform 3 goes to ...)





(봄에 피는 자카란다 꽃)


철로길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여름빛이 강렬하게 쏟아지던 날,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지면에서 올라오는 꽃향기에 난 잠시 도취되었다. 잠시 서서 나뭇잎 사이 몽글몽글한 빛에 시선을 두었을 때 아무런 감정 없이 까칠했던 내게 그 땅은, 심연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애틋한 감정을 솟구치게 했다.(아마도 영화에서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압도적인 그런 느낌이 들 정도)

그렇게 몽환적 감정을 잡고 현관에서 나와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러나 비련의 여주인공도 잠시뿐, 갑자기 철로길 나무숲 어디선가 거친 사내가 정면으로 날 향해, 그것도 압도적인 분위기로,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내 얼굴을 향해 퍼드득 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방어할 틈도 없이 난 당황했고, 등에 식은땀이 나면서 온몸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몽환적 분위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와장창, 접시 깨지는 소리가 되어 냉정한 현실로 돌아왔다. 그 소리는 대기를 가로지르는 음습하고, 매섭고, 날카로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주변에 사람도 없었기에 싸한 바람결과 함께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거친 사내는 그야말로 높은 콧대를 자랑하듯 핏기 없는 내 얼굴을 향해 거침없는 자세를 취해 달려왔기에 본능적으로 난 얼굴을 돌려 피하면서 그 자의 공격으로부터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틈 사이로 매부리코를 연상케 한 그 거친 사내는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내 등 뒤에서 비웃는 소리를 내며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까아악, 까악, 까악, 깍깍깍깍.


이후로 그 사내는 매일, 한결 같이, 내가 정확히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급습하듯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안될상 싶어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하나 만들어야 했다. 일단 후드티(그 더운 여름날에)에 모자를 쓰고, 장대 같은 우산을 한 손에 쥐고 장엄한 자세를 취하며 현관문을 나섰다.

역시나 그 거친 사내는 영락없이 내 무기를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물의 영장을 무시한 자세로 공격해 왔다. 난 사내의 그 눈빛, 모멸감에 휩싸여 소머즈와 같은 힘을 발휘하여 긴 장대 우산을 공중에 휘날렸다. 무언가 싸한 느낌이 들어 겁먹어 숙인 고개를 들어보니 그 자는 벌써 사라진 뒤였고 동네 호주인들은 날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보였겠지 아침부터 그랬으니까)


며칠 뒤 난 억울함, 분노한 마음, 모멸감, 자존심 상함등등의 이유로 저녁 무렵 pub에 가서 맥주 한 잔을 놓고 친구들을 불러 머리를 맞대며 작전을 짜기로 했다.


- 어떻게 할까

- 어떻게 하긴 출근 시간대를 바꾸던가, 아니면 적진에 쳐들어가서 그 자의 집을 마구 쑤셔놓는 거야.

- 그건 좀 너무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아. 그 자의 친구들이 떼거지로 덤벼들 수도 있어.

- 그럼 가면을 쓰고 다니던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말이야. 핼러윈에 쓰는 유령 가면.


그다음 날 난 유령 가면을 쓰고 현관문 앞에서 적진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나왔다. 역시 그 자는 날 기다렸다는 듯이 울창한 숲, 공중에서부터 큰 매부리코로 거침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난 가면 안, 구멍 뚫린 곳으로 그 자를 바라보았다. 다쳐야 가면이지, 지가 덤벼야 손해고. 그러고 피하지 않고 가만 있었다.

그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세찬 바람을 몰고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끼익~ 급정지를 하더니 그의 머리를 아주 잠깐(이건 나와 그 사내만이 알 수 있던 찰나의 눈빛이었다) 갸우뚱하더니 실망한 듯, 날개를 힘없이 저으며 공중으로 다시 올라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난 기차역까지 유령 가면을 쓰고 출근했지만 그 자는 출현하지 않았다.(그때 유령가면을 쓰고 다닌 바람에 동네 사람들한테 오해를 받았다. 물론 나중엔 그 까마귀한테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오해는 자동으로 풀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한참 후엔가 어느 가을날인가, 길을 가다가 동네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 매부리코처럼 생긴 커다란 까마귀가 꼭 내가 현관문을 열고 출근할 때마다 날 공격해서 미치겠어.


난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을(?) 얼른 수습하고 출근길로 빠르게 걸어갔다.





가끔 그리운 땅, 여기서도 아침의 단잠을 까마귀가 깨울 때가 있다. 난 그럴 때마다 순간 여기가 기차역 앞에 있던 호주집인가 착각한다.

이방인으로서 호주땅에 머물러 있었던 시간들에, 한국땅에 그리운 것들로 인하여 고독하였던 시간들, 푸른 하늘 높이 지나가는 비행기 꼬리라도 잡고 가고 싶었을, 한국을 그토록 그리워했던 시간이었기에도,


내 고독한 삶을 통과한 모든 시간들은 그 까마귀조차 내 기억속 달달한 솜사탕 같을 그리움으로 땅에 다시 소환되어, 현재를 살아갈 감미로운 것들의 에너지로 다시 충전되기도 한다.


(베란다 앞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내릴 때)


그때 그 까마귀는 전설 속 콧대 높은 영웅처럼 아직도 그 눈빛과 소리로 내게 남아있다. 만물의 영장을 아주 우습게 했던 그의 소리가 지금 아침 창문으로 쏟아져내려 오는, 여기 햇살 속에 여전히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까악, 깍, 깍, 까악, 깍깍깍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