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렸을 때 자신만의 간절하게 바라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꼭 직업적인 것만이 아니라 요즘 시대처럼 조물주 위에 건물주, 또는 재벌 2세 이런 것들이 대세인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그 또한 바랄 것들이다. 어찌 보면 내가 구석기 시대를 살아온 세대마냥 요즘 젊은 사람들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어렸을 때 나의 꿈은 가볍거나 소소한 희망일 수도 있겠다. 현대는 자본주의가 주는 달콤한 열매와 소유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열망의 경계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처럼 가끔은 우리의 삶이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 하지 않을까 한다.
어렸을 때 나의 꿈은 동네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즐겨 읽기 보다는 대형서점에 가서 은은한 조명아래 향긋한 책 냄새 맡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꺼내들어 펼쳐보면 활자화된 종이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최대한 코를 큼큼거리고 냄새를 맡으면 무언가 알 수 없는 행복한 기운들이 찰나에 내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물론 A4용지와 같은 종이와는 전혀 다른 냄새다.)
어릴 적 가끔 상상했었다. 봄빛이 가득한 날, 책방문을 열고 동그란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보면서 요정이 되어 날개를 달고 책의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다.
(김유정 문학촌에서)
나는 어렸을 때 한옥집이 많이 있었던 독립문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독립문 큰 사거리 앞에 영천시장이 있었다. 그 곳엔 두 개의 책방이 있었다. 한 곳은 중고책방이었는데(상가 건물이 아닌 골목 책방), 시장통 좁은 골목길을 끼고 양쪽으로 책이 천장까지 쌓여있거나, 바닥까지 중고 자습서 같은 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곳에 가면 없는 책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또 한 곳은 시장을 끼고 근사한 상가 건물 1층에 있던 책방이었는데, 그 곳은 언제나 유리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조명등이 환하게 책들을 비추고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시장통을 걸으면서 호기심 많은 눈으로 두 곳을 구경하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는 혼자서 중고책방 앞에 서성거리거나 또는 근사한 상가 건물 책방 앞에 서서 유리문 안으로 보이던 하얗고 깔끔한 새 책에 대한 동경심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거실에 있는 책장에 외국문학전집을 사다가 채워놓으셨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전집을 진열해 놓으신 것은 당신께서 글에 대한 염원이 있으셨던 것 같다. 자랄 때 어머니는 신문 사설을 오려 가득히 모으시거나 시를 즐겨 쓰셨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유쾌한 나의 다섯 형제들은 아무도 그 책장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책은 결국 먼지만 쌓여갔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말 수가 적었던 나는 중학교 2학년 봄날, 책장 안에 있는 먼지 쌓인 책을 모두 털어내어 거의 다 읽고나자 앙증맞은 생각을 행동으로 거침없이 옮기게 되었다.
그 앙증맞은 생각이란 이랬다.
책방에 앉아 책 냄새를 큼큼거리며 매일 맡을 수 있는데다 공짜로 책을 볼 수 있을거라는 아주 소박하지만 거대한 꿈을 품고(며칠 그 책방 앞에서 서성거리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돌아섰던 것 같다.) 아슬아슬, 콩닥콩닥, 작은 가슴을 부여잡고, 유리창 너머로 동경심을 주었던, 반짝반짝 빛났던, 근사한 상가 건물 책방 주인아저씨한테 가서 깜찍한 거짓말을 했다.
- 아저씨...제 친구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요... 병원비를 내주고 싶어서요. 그래서 여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인자하게 보였던 책방 주인아저씨는 나를 한참 슬픈 눈으로 보시며 턱을 괴고 고민하시더니,
- 얘야, 너의 사정은 딱하나 일하기는 너무 어려서 안될 것 같구나. 미안하다 도와주질 못해서.
난 홍당무가 되어버린 얼굴을 가녀린 두 손으로 감싸고 주인 아저씨한테 죄송합니다, 하고 무작정 그 곳을 도망치듯 나왔다. 그 주인아저씨는 나의 거짓말한 딱한 사정에, 어린 내가 상처 받을까봐 마음 깊이 고민을 하셨던 것 같다. 아직까지 그 책방이 있다면 진실을 이제서 고백하리라. 그토록 책 냄새가 그리웠던 거라고.
어릴 적 꿈이 책방에서 책 냄새 맡으며 책 읽는 것이라는(가끔 요정도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러한 현실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채 그저 상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중2의 깜찍한 발상처럼,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때 나의 아날로그 시대는 책방 주인이 꿈이라는 소박한 추억으로 한 장의 앨범 속에만 앙증맞게 저장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