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면, 캐서린의 국제학교 생활도 어느덧 네 번째 달에 접어든다. 처음 중간고사 때만 해도 우리는 학교 과제의 형식조차 몰라 과외 선생님과 한 문장씩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과제를 함께 완성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캐서린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다.
“나 혼자 할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
그 말이 어쩐지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네 살 무렵의 똘망똘망하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묘해졌다.
캐서린은 원래 독립적인 아이였다. 스스로 하기를 좋아했고, 책임감을 가진 아이였다. 그런 성향이 기특하면서도, 이번 과제는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과외 선생님은 캐서린의 방식대로 하게 두지 못해 어려워했고, 계속 고쳐야 한다며 답답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점수를 생각한다면, 지금 캐서린이 만든 알록달록한 포스터는 학교가 기대하는 스타일과는 멀다는 것을. 이 학교의 선호는 마치 대학생의 제출물을 연상시킬 만큼 깔끔하고 정돈된 포스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이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색감과 조화를 차마 뜯어고칠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은 아직 아이인데, 왜 어른의 기준을 덧씌워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포스터는 세상에 하나뿐인 캐서린의 스타일이었다. 알록달록하고 활기차고,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는 작품.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포스터에 마음껏 박수를 쳐주었다. 한국이 아닌 이곳에서는, 나는 아이가 점수에 매달려 지내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며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두 눈을 꼭 감고, 그저 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프레젠테이션 날, 학부모 참관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고 아침 9시부터 교실 뒤편에 조용히 서 있었다. 캐서린이 마지막 발표자라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괜찮았다. 그런데 학부모는 나 혼자였다.
다른 아이들의 발표를 보며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상위권 아이들의 포스터는 정말 대학생 수준이었다. 선생님들의 피드백도 “내용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질문할 게 없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국제학교는 조금 더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이 존중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안에서도 ‘정답 같은 형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포스터들은 아이가 만들었다기보다 부모의 숙제처럼 보였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캐서린은 확실히 성장해 있었다. 아이컨택을 하며 또박또박 말했고, 선생님들의 질문에도 대답하고, 마지막에는 반대로 질문까지 던졌다. 집에서 더 연습시키고 싶었지만, 내가 밀어붙이면 아이가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멈춰섰던 날들이 떠올랐다.
두 달 전 중간고사 발표가 생각났다. 그때 캐서린은 “I don’t know”만 반복했고 발표는 5분 만에 끝났었다. 그 아이가 지금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발표가 끝난 순간, 마음속에서 문장이 하나 조용히 떠올랐다.
“그래, 네 번째 달이구나. 그동안 참 많이 자랐구나.”
시험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한 달 동안 겨울방학을 보내러 한국에 왔다. 캐서린은 도착하자마자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만나 환하게 웃었다. 발리에서는 학교와 집만 오가며 지냈는데, 한국에서는 친구들과 놀이터도 가고, 편의점도 가고,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다. 친구들이 많이 그리웠을 텐데, 내 욕심에 아이를 멀리 데려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도 이렇게 충전하면 돌아가서 다시 잘할 수 있겠지.’
짧은 한국 여행은 캐서린에게 작은 숨구멍 같은 시간이었다. 익숙한 언어, 익숙한 친구들, 아무 말이나 툭 던져도 통하는 편안함. 그 사이에서 아이는 다시 기운을 차린 듯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한결 마음이 놓였다. 발리에서의 생활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이는 나름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4학년 2학기도 잘해보자.”
나는 그렇게 조용히 다짐했다. 아이의 속도를 믿어보기로 했던 결정이 조금씩 답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방학이 끝나면 다시 발리로 돌아간다. 캐서린의 다섯 번째 달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까. 조금 걱정되면서도, 이상하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