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모 그리고 고모로...
혹여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열번 째 글을 쓰고 나서, 이 글을 이어가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딴에는 기억을 정리하고 과거를 털어버리고자 한 글이었는데, 고통은 무한정 이 글쓰기를 외면하게 하더군요. 그래도, 시작한 일, 나를 위해서 꾸역꾸역 이어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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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순간 엄마를 잃었다. 어리기도 했지만, 내 모든 생활을 함께 했던 엄마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적인 상실이었다. 엄마가 사라진 뒤, 이모(엄마의 바로 아랫동생)가 와서 우리를 돌봤다. 엄마의 동생이었지만 이모는 미혼이었고, 아주 어렸을 적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던 덕에 우리 남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빠는 엄마에 대한 어마어마한 배신감, 증오로 엄마의 자매를 곱게 볼 리 없었을 터다. 드러나는 갈등은 없었지만 훈기도 다정함도 없는 집. 돌봄을 받았지만 상실이 지배하는 분위기. 솔직히 나는 그 시간의 몇몇 순간 외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건가.
남아 있는 3학년 학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동네에서 약사네 딸, 예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주목받던 나는, 한순간 빚진 엄마를 둔 엄마의 비극적 존재가 됐다. 부쩍 이상 행동을 했다. 성냥에 불을 붙여 제대로 끄지 않고 버렸다가 온 집안을 연기 투성이로 만든 적도 있었다. 이모의 존재는 처음엔 반가웠지만 아무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나는 4학년에 진학했다. 엄마가 있었을 때, 아니 문제가 불거지기 전, 나는 학교다니면서 울며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 시절에도 있던 아이들 사이의 기싸움, 잘 놀다가도 어느날 소외되는 일들이 있었고 엄마가 있을 때나 나는 울면서 집에 돌아왔지만 그 이후엔 우는 것도 사치였다. 그렇게 학년이 올라갔을 때, 나는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고, 반의 모든 친구들과 잘 지내기로 다짐했다. 모든 친구들에게 다정하고, 나의 역할을 다부지게 해 나가자 했던 나는 학기초 반장 선거에서 1등을 했다. 하지만 당시 '국민학교'는 여자가 반장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압도적 1등을 했지만, 투표 뒤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교무실에 다녀온 담임은 여자는 반장이 될 수 없으니 부반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괜찮았다. 반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소외되지 않고 아이들의 그 기싸움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밤중에 잠이 깼을 때, 거실로 나간 나는, 마주 앉은 채 얼굴을 두 팔에 묻고 있던 이모와 뭔가 말하고 있던 아빠를 봤다. 그리고 그 며칠 뒤, 이모도 우리를 떠났다. 이모가 우리에게 어떤 인사나 당부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모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집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걸리는 고모, 아빠의 유일한 친누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연히 나도, 내가 4학년이 되면서 1학년 입학을 했던 내 여동생도 전학을 하게 됐다. 많은 축하를 받으면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입학을 한 나와 달리, 이모 말고는 없었던 내 동생의 입학식. 그 아이는 그때부터 참 많은 상실을 겪어야 했다.
아빠의 손윗 누이인 고모는 아이를 낳아 기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모부는 하나뿐인 처남 가족을 살뜰히 대한 사람이었고, 우리를 다시 없는 친 조카처럼 아껴줬지만, 고모에게 밖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게 한 사람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없는 고모집에는 아픈 고모부와 고모 그리고 고모부가 다른 곳에서 낳았지만 이미 고모가 오랫동안 딸같이 키우는 사촌 언니가 사는 집이었다.
당시 아빠는 하던 약국을 정리하고 지방에서 다시 약국을 시작하느라 우리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그 집에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어린 3남매가 얹혀졌다.
부부와 장성한 딸이 살던 집. 방 3개인 아파트에서 우리 3남매는 남아 있던 방 하나에 모든 짐을 꾸렸다. 우리의 옷가지와 교과서만 들고 왔을 뿐이었다. 지난 삶의 방식, 모든 관계, 기억, 애착 그리고 웃음, 어리광 심지어 잘못하면 엄마에게 회초리로 맞았던 기억까지 아쉽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만큼의 자리엔 낯섦, 두려움, 서러움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특히 나에겐 어린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하나가 나도 모르는 사이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