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으로 구원하소서 12

고아 아닌 고아였던...

by 영원

우리가 살던 집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였던 고모집이었고, 그 전에 숱하게 드나들던 관계였지만 이상하게도 온통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기 보다 모든 순간이 공포스러웠다. 그 어떤 곳도 안온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보호자'가 아니었다. 아무도 우리를 괄시하지 않았지만 제 자리가 아닌 곳, 엄마 아빠를 잃은 아이들에게 그 어떤 피붙이도 기댈 대상은 아니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전학을 간다고 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을 기억한다. 안쓰러워하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한 선생은 엄마와 절친했던, 그러나 결정적으로 등을 돌렸던 내 친구 엄마의 남편이었다. 그때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날, 고모집으로 하교하던 길, 아파트 앞에 서 있던 한무리의 사람들을 봤다. 엄마의 지인들이자 채무자였던 이들을 보고, 엘리베이터도 마다한 채 11층까지 뛰어 올라가 고모에게 "그 사람들이 왔다"고 숨을 헐떡이며 말하던 순간, 나는 숨이 차서가 아니라 숨이 막혀서 고통스러웠다. 너무 놀랐고, 무서웠지만 나는 그날 아무 위로도 받지 못했다.


새로 전학한 학교는 첫날부터 거대한 괴물 같았다. 하필 날이 흐렸고, 낯선 것을 어려워하는 내향적인 나는 처음 그 학교, 그 교실로 들어간 그 때가 여전히 괴물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기억한다. 나는 그 학교에 적응하는 데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날은 동생과 등교하던 길에 동생만 들여보내고 나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게 싫었고 교실로부터 도피했지만 나는 학교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 운동장을 서성이던 나를 교감선생님이 발견했는데, 나를 보고 몇 마디 묻고는 굳이 교실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건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을까. 결국, 동생을 데리고 하교하던 나를 우리반 친구가 불러세웠고, 그 다음날 나는 담임에게 울며 용서를 빌었다.


나에게 그랬을 때, 이제 막 1학년 1학기를 지낸 내 동생은 어땠을까. 아주 나중에서야 그 아이가 그 당시 견뎌야 했던 일을 알고 나는 아주 많이 울었고, 동생에게 용서를 빌었다.


하루는 동생이 말했다. "언니, 선생님이 부모님 모시고 오래". 초등학생이니 상담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나보다 얌전하고 묵묵하며, 상냥한 동생이 어떤 문제를 일으켜서가 아니라 의례적인 상담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왜 고모나 아빠에게 전하지 않았을까. 나는 알았다고 답하고 면담 날짜에 동생의 교실로 갔다. 저학년이니 먼저 학생들이 하교한 빈 교실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큰 용기를 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동생의 교실을 찾아가, 뒷정리를 하고 있던 동생의 담임 선생님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현경이 언니에요. 부모님 오시라고 해서 제가 왔어요." 11살짜리였다. 책상 줄을 맞추고 있던 선생님을 도우면서 짐짓 어른스럽게 "내가 우리 동생 보호자"임을 말하던 11살. 그 선생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조지종을 듣고 그 선생님은 다시 고모나 아빠에게 연락을 했을테다. 하지만 내 동생은 어쩌면 내 치기때문에 오히려 곤란한 상황을 겪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일로 나에게 되돌아온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 때에, 아주 비장하게 동생의 교실로 들어선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여전히 다 알 수는 없다.


가장 애처로웠던 건 당시 4살짜리 막내였다. 그 아이는 한참 엄마 손길이 필요할 때, 고모라고는 하지만 그 나이와 그 집의 상황에 비하면 보육시설과 다르지 않은 상황을 겪어야 했다. 용돈을 모아 막내를 위한 곰인형을 사 안기고 시시때때로 살폈지만 그 아이에게 그 시절 어떤 결핍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아파트 같은 층에 또래 친구가 있는 집이 있었다.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며 친구가 됐다. 어느 겨울날, 그 친구와 아파트 앞 썰매장에서 놀고 온 막내의 바지가 온통 젖어 있었다. 한 겨울에 바지가 젖었으니 얼마나 추웠을 것인가. 당시 그 아파트는 오후 5시 이후에나 온수가 나왔다. 그 때는 오후3시 즈음. 나는 따뜻한 물에 씻기고 싶어 가스불에 물을 끓이려고 앉혔는데, 사촌언니가 만류했다. 온수가 나올 때 씻기자고. 나는 그 일이 30년 넘어서도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어떤 면은 적응하고, 어떤 돌봄도 받았으며, 어쩌면 큰 탈은 없는시기를 보낼 즈음. 엄마가 떠난 뒤, 우리를 돌보던 이모가 학교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고모와 아빠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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