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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구원하소서 4

어설픈 연민은 고통

by 영원

잠시, 나의 아빠가 된 그의 이야기를 하자면... 비극은 아빠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로부터다. 아빠의 생모와 먼저 혼인한 그는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첩을 들였는데, 우리 아빠 전 본처에게서 두 딸을 낳았고, 첩으로부터 두 두 아들을 낳은 뒤, 본처에게서 첫 아들인 우리 아빠를 낳았다. 들은 바로는 두집 살림이 아니라 한 집에서 처첩을 거느렸다고 한다. 첫 아들을 낳은 우리 친할머니는 그러나 아빠가 100일 즈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 뒤로 첩에게서 아들과 딸들을 줄줄이 낳았고, 시집을 간 누이들과 달리 그 집에서 자랐던 우리 아빠는 운동화 하나 사 달라는 말때문에 몰매를 맞는 일도 겪었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을 들은 것은 20살이 지나서였고, 그동안 명절마다 만났던 할머니, 큰아버지, 둘째 큰아버지의 정체는 무엇보다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30살이 넘은 내가 아빠를 인간적 연민으로 대하는 이유가 됐다.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눈물 흘리는 아빠에게서 들었고, 마음 약한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차마 그를 외면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빠와의 결혼이 모친의 의견에 반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었지만, 아주 오래 당사자와 모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됐다.


결혼 뒤, 엄마와 아빠는 대전에 신혼집을 차렸다. 지금은 당시는 대전시 비래동이 아닌 비래리의 한 아파트. 아빠는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약국을 차려 운영했지만, 아빠는 공간으로서의 집 개념도, 가정으로서의 집 개념도 없었다. 그러니 약국을 성실히 운영했을리가.


그렇게 울며 불며 결혼한 뒤, 그 둘은 동화처럼은 아니어도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며 살았어야 했건만, 현실은 아니었다. 첫 신혼집에서 살다 나를 임신한 엄마는 수시로 단수가 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에서 단수가 되면 만삭의 몸으로도 홀로 5층까지 물을 길어 날랐다고 했다. 과장을 할 수도, 과장 이전에 상상을 할 수도 없는 그 상황을 들으며 나는 진심으로 아빠를 원망했다. 입덧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한 남편을 견뎌야 했던 엄마는 아이를 낳는 과정마저 순탄치 않아, 대학병원 모든 산부인과 의사들이 출동한 자리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른바 "산모가 죽다 살아난" 뒤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살던 곳에서 보다 대전시 안쪽으로 이사를 했지만 엄마의 삶은 태어난 아이로 더 큰 짐이 지워졌을 뿐이었다. 남편은 약사인데, 그 아내는 갓 낳은 아이를 등에 업고 하숙을 치는 상황. 내 기억에 하숙생인 고등학생과 노는 장면이 있으니 아마 하숙을 치며 생계를 도모하는 엄마의 삶은 꽤 오래 이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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