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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구원하소서 6

고통으로...

by 영원

고모와 고모부가 가지고 있던 공장은 브랜드 가구 공장에 목재를 납품하던 곳이었고, 거기에 사택처럼 딸린 곳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살았는데, 사택이었지만 고모댁이 살던 곳이어서 방이 세 개였고, 거실도 넓었다. 나는 그 집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했고, 3년 터울이었던 우리 삼남매와 그 집에서 조금 안정적으로 살았다. 아빠의 약국은 바로 길 건너 맞은편이었고, 집 앞에서 아빠 약국이 보였다.


그 집에서 나는 한글을 배우고, 심심하면 아빠 약국에 놀러 가고, 집에선 동생들을 엄마와 함께 돌보고, 넓은 마당에서 동네 친구들과 놀았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널린 목재로 놀이기구를 만들어 탔고 집 앞 화단에 핀 채송화를 아꼈다. 막내동생이 태어나 자란 집도 그 집이어서 나는 큰누이 역할을 하느라 막내에게 사과를 갈아 먹이고 그 당시 유행하던 거버이유식 바나나맛을 떠 먹이며 돌봤다. 물론 노는 데에 눈이 더 팔린 내가 엄마의 당부를 잊고 보행기로 질주하던 막내가 현관에서 떨어진 상황을 책임져야 했을 때도 있었지. 그날 나는 속옷만 입은 채로 쫒겨나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한 기억은 있어서 아빠가 우리를 위한 그네를 마당에 만들어 줬는데, 그 그네는 다음 이사간 집까지 따라왔고, 아빠가 우리를 위한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준 첫 증표였다. 왜냐하면 그걸 주문하고 만드는 아빠의 표정이 정말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그 그네는 아직 나의 기억속에 온전한 형태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 집에서 지내던 시절, 나는 아주 나중에 우리집 비극의 단초였던 하나의 현상을 목격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아빠는 3만 원, 1만 원, 2만 원, 이렇게 매일 우리가 함께 자던 방의 장 위에 "오늘의 생활비"라며 매일 돈을 얹어놨는데, 그건 그날 또는 그 주의 엄마에게 주어진 생활비였다. 그때 엄마는 이미 아빠와의 결혼생활보다는 우리 삼남매를 키우는 것에 몰입했고, 남부럽지 않게 뭐든 해주면서 키우고자 하는 엄마에겐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규모 없는 돈이었다. 가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아빠, 남편에게서 얻는 상실감을 자식에게서 채우고자 하는 엄마는 그 시점부터 서로 맞지 않았고, 문제의 단초를 만들고 있었다. 아니 문제의 본질은 아이 셋을 가진 부모가 여전히 자아를 정립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때에 우리가 지내던 사택 옆 고모네가 새로 지은 주상복합에 입주했다. 그리고 그때는 비극의 폭발,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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