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잊고 있던 나의 오빠야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호두파이에 꽂혀 미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때 남편한테 무척 서운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바빠지다 보니 빨래를 하긴 하는데 정리를 못하기 일쑤였다.
그날도 걷어둔 빨래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던 저녁이었다. 퇴근해서 들어온 남편이 그 모습을 보더니 베란다에서 큰 비닐봉지를 찾아왔다. 박스채 호두를 사서 쓰면 호두를 담았던 큰 비닐이 생기는데 남편이 그걸 찾아와서 빨래를 쓸어 담아 베란다에 던져버렸다.
하아... 호두를 담아뒀던 비닐이라 빈봉지여도 안에 호두가루가 잔뜩 붙어있던 봉지였다.
새로 빨아둔 빨래는 다시 엉망이 될 수밖에.
난 화가 치솟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 따지고 화내면 그날 저녁 우리는 싸워야 했을 거고 난 그날 밤 구워야 할 물량을 맞추지 못할게 뻔했으니까.
그래... 남편은 봉지에 호두 가루가 묻어있다는 건 몰랐을 거다. 하루종일 일하고 귀가했는데 집이 엉망인 걸 보고 짜증이 났겠지.
그렇지만... 그때 오빠야는 왜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까.
.......
또 다른 어느 날 새벽, 그날도 애들을 재워두고 밤새 호두파이를 굽다가 마지막 파이를 오븐에 넣었다. 타이머를 돌려놓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난 그대로 주방바닥에 엎드려서 잠이 들어버렸다. 1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도저히 졸려서 버티기가 힘들었고 주방바닥은 너무 따뜻했다.
그렇게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잠시 후 남편이 비명을 지르면서 나를 마구 흔드는 거다.
"진아! 진아!!!"
나는 부스스 일어났다.
"아 뭔데 그냥 기다리면서 잔 거다"(부산사투리)
그는 내가 파이 굽다가 기절한 줄 알았단다.
훗날 몇 년이 지나서 그에게 그때 일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왜 그때 나에게 몸 축나겠다고 일을 하지 말라거나 좀 줄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냐고.
내심 서운함이 내 마음에 남았던지 불쑥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오빠야는 그러더라.
니가 그렇게 일이 좋아서 미쳐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해라, 하지 마라 이야기를 하겠냐고.
이 남자... 무심한 건지 속이 깊은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사람도 이 남자였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도 이 남자였다. 그는 정말 육아만 하는 아내를 한심하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본인의 고달픔을 나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나는 내 시야에만 갇혀서 위로받고 싶었던 그를 오랫동안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보니 그는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