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파이 Feb 03. 2024

패셔니스타 할머니

스스로 가꾸는 여자는 언제나 아름답다

파이집 창문 너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간다. 아파트 뒤편이라 대부분은 동네 주민들이다. 수년간 오가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많은 걸 파악할 수 있다.

파이집에서 따로 보던 사람들이 같이 걷는 걸 보며 가족관계를 알게 되고, 출근 복장을 보고 직업을 유추하기도 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분들도 발견하게 되는 데 그중 한 분이 '패셔니스타 할머니'다.
내가 혼자 붙인 별명이다.

할머니를 처음 본 건 아마 7~8년 전인듯하다.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핑크색 헤어였기 때문이다.
보통의 할머니들이 흔히 하시는 레드 코팅 헤어를 떠올렸다면 오산이다.


온전한 탈색이 되었을 때 가능한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핫핑크 헤어.
아마도 탈색이 필요 없는 자연 흰머리의 장점을 극대화한 염색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웨이브 진 짧은 헤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감히 상상도 못 하고 따라 할 수도 없는 독보적인 스타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의상은 또 어떠한가.
그 연세에도 날렵한 몸 라인.
군살 하나 없이 길고 얇은 팔다리.
가느다란 허리.
그 몸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청바지와 하이힐을 자주 신으셨다.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도,
강렬한 색상의 짧은 티셔츠도,
뉴진스가 유행시키기 전부터 입으시던 청재킷, 청바지 패션도,
할머니에겐 모두 찰떡이었다.

그녀의 패션 아이템은 다양하다.
모자, 스카프, 허리띠, 조끼, 구두, 헤어핀, 가방...

어느 것 하나 기능성만을 추구한 것은 없었다. 할머니가 착장 하면 그것은 패션 아이템이 된다.

모자도 베레모부터 챙 넓은 모자, 머리에 얹혀 지기만 하는 모자 등등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써보지 못할 법한 모자를 자유자재로 쓰고 다니셨다.


가느다란 목선에 어울리는 스카프도 그날의 의상에 따라, 날씨에 따라 포인트가 되었다.

모아두면 과한 의상일 것 같이 느껴지지만 할머니의 룩은 언제나 개성만점, 매력만점이었다.


할머니가 인스타에서 유행하던 오늘의 착장 OOTD를 올리셨다면 팔로워 몇십만은 껌이었을 거라고 상상해 본다.

정말 나 혼자 감상하긴 늘 아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사진을 찍어드리고 싶었지만 마음뿐.
나 혼자 쌓인 내적 친밀감으로 그녀에게 다가설 순 없었다.

가끔 친구들이 파이집에 놀러 왔을 때 할머니가 지나가시기라도 하면 나는 호들갑을 떨며 소개하곤 했다.

보아라!
저 연세에도 저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일 수 있다!

물론 할머니는 모르셨다.
나 혼자만의 동경이다.

나의 옷은 어떠한가.
무채색에 평범한 옷.
패션 센스라곤 1도 없다.
늘 비슷한 스타일에 단정한 옷.
옷집에서 가장 무난한 옷으로 골라온 그런 옷만 나는 주워 입곤 한다.
그래서 할머니의 과감한 패션은 연신 내 마음을 훔치곤 했다.

그렇게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여인이 어느 날 파이집에 방문했다.
선물용으로 호두파이를 구입하는 그녀에게 처음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수년간 당신을 흠모하며 매일 지켜보고 있었노라 고백하면 그녀가 놀랄까,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망설여졌다.

그래도 자주 오는 분이 아니셨고, 나는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옷을 너무 멋있게 잘 입으시더라고.

그녀는 예상대로 깜짝 놀랐다.

여기서 파이를 굽다 보면 사람들이 오가는 걸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고 말씀드렸다.
언제나 아름다우셔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할머니는 쑥스러워하시며 요 몸이 불편해져서 전처럼 입진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최근 걷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우셨던 거 같다. 연세가 드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아마 많이 아프셨던 모양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일직선으로 걷질 못하셨다.
이럴 땐 나이가 든다는 게 참 서글프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혹시 시니어 패션모델이시냐 아니면 젊을 때 연예계나 패션계에서 일하셨냐 여쭸다.

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해서 다양한 시도를 즐기는 것뿐이라고 하셨다.

그토록 멋진 재능을 평생 혼자서만 즐기고 계셨다니 아쉬웠다.
누군가 그녀의 재능을 일찍 발견해 줬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굳이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늘도 멋지게 차려입고 외출을 한다.
역시나 나는 못 입을 것 같은 하얀색 큰 꽃무늬 패턴의 아우터를 입으셨다.
전보다 걸음걸이가 불편해서 이제 하이힐은 안 신으시지만 여전히 그녀는 멋지다.

하루에 두세 번씩 외출하실 때도 있다. 그때마다 의상이 다르시다. 신기하다.

나에게 그녀는 연예인처럼 동경의 대상이다.
여전히 그녀는 누구나 주목할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
나의 로망이다.
어쩌면 나의 덕질이다.

내일은 또 어떤 의상을 소화해 내실까.
그녀의 외출을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두파이를 구웠더니 친구들이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