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쯤 연애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 함께 살던 이모가 보던 할리퀸 로맨스 소설로 연애를 배운 나는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한 상당한 기대감이 있었다.
첫 번째 연애는 친구와 처음 가본 종로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술을 마음대로 마신다는 것 외에는 여전히 여고생시절이나 다름없이 놀던 우리는 어른들 세계가 궁금했다. 명절쯤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나이트클럽을 한 번쯤은 가보자며 비장한 각오로 종로까지 나섰다. 왜 종로였을까? 기왕이면 강남으로 갈 걸. 우연히 약속이 있어 갔던 종로에서 호객행위를 당해 나이트클럽 입구까지 끌려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거기가면 아마 또 누가 와서 끌고갈지도 모른다고 거기로 가보자고 했다. 호기심에 잔뜩 긴장해서 상기되어 있던 우리는 호객꾼에게 잡혀주는 척, 못 이는 척 나이트클럽이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어두컴컴하면서도 번쩍번쩍 화려한 장소였다. 스테이지 쪽에서는 조명이 신나게 돌아가고 쾅쾅 울리는 음악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뒤섞여 춤추는 모습을 괜히 안 보는 척 슬쩍슬쩍 구경하며 들어가 앉았다.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졸아있었을까. 들키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바짝 긴장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여자애들 두 명이 얼마나 어설퍼보였을지 이제는 너무 알 것 같다. 기본안주와 맥주를 주기에 홀짝홀짝 마시다가 용기를 내서 스테이지로 나갔다. 내 생애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몸을 흔들어 본 것은. 생각보다 부끄럽지도 않았고 흥이 올라 친구와 둘이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몇 곡 신나게 추고 나니 조용한 음악으로 바뀌어서 쉬는 시간인가 보다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는데 웨이터가 오더니 덜컥 부킹을 하자는 거다. 말로만 듣던 부킹을 하게 되다니. 술도 얻어먹고 남자도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에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딱 봐도 우리보다 나이 많은 직장인처럼 보이는 남자 둘이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차가 있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도 했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이 건대입구역이라고 했더니 차로 태워다 준다기에 얼른 따라나섰다. 진짜 철딱서니 없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모지리들이다. 이상한 사람들을 안 만났으니 망정이지 상상만으로도 쭈뼛하다.
건대입구역에 도착해서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우니 맥주 한잔 하자며 붙잡길래 또 못 이긴 척 함께 맥주를 마셨다. 전화번호를 달라기에 대충 아무 번호나 써서 주고 집에 왔는데 순진한 내 친구님이 아주 정직하게 번호를 드리셨더구먼. 친구를 통해 나에게 애프터 신청이 들어왔다. 이놈의 호기심이 문제다. 뭐 별일이야 있겠나, 밥이나 한 끼 얻어먹자 생각하고 나간 자리에서 정중하고 진지해 보이는 모습에 덜컥 만나보기로 약속을 하고 들어왔다. 그때가 내 나이 23살이었으니 나보다 10살이 많은 그가 얼마나 어른처럼 보였겠나. 그리 이른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정식 교제를 해본일이 없었던 나는 정말 설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고 나름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었다.
나이차이가 꽤 있었기에 무조건 적으로 나를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늘 깔려 있었다. 그런데 차마 내 입으로 나는 이런 게 좋고, 저런 게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있는데 입이 열리질 않았다. 그런데 막내여서 그런지 만나서 뭘 할 때마다
“오빠는 이런 걸 좋아해, 저런 걸 좋아해. 기억해 놔. 알았지?”
이러는데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모른다. 속으로는 ‘어쩌라고, 내가 왜 기억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 하고 괜한 짜증만 잔뜩 냈었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친구들을 만날 때와는 가보지 못했던 여러 장소들을 많이도 데려가 주었다. 만날 벙벙한 바지에 워커 같은 것만 끌고 다니던 내가 여성스러운 로퍼나 단화에 팔랑팔랑한 치마나 원피스를 주로 입게 된 것도 첫 번째 남자친구 때문이다. 퇴근 후에 만나느라 늘 정장을 입고 나오는 사람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옷차림을 맞추게 되었다. 또 여성스럽게 입어보고도 싶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내 주변에 차가 있는 친구는 없었다. 다들 부모님 차를 한번씩 빌리는 정도. 그런데 남친이 차가 있으니 얼마나 좋아. 모시러 오고, 모셔다 주시고. 중국에 5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다녀와 대학교 복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학교가 지방이다 보니 자취방을 준비하고, 짐을 옮기는 일을 혼자 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남친이 앞장서 일일이 다 도와주니 엄청 편하고 좋더라. 복학을 한 후에는 주중에 만나 데이트 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춘천에, 그 사람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주말에만 잠깐씩 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주말에 가족모임이나 친구들과의 약속이 잡히면 만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와중에 팀 프로젝트를 함께 하던 복학생 오빠와 자꾸만 눈이 마주치기 시작했다. 절대로 양다리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첫 연애 상대인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이렇게 내 첫 번째 연애가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별은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쪽에서는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아직 진행 중인 기묘한 경험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질척인다는 말로 그를 비하하기도 했었다.
나름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다고 생각한 나는 자꾸만 눈이 마주치던 복학생 오빠와 CC가 되어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느 점심 자취방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려고 대문을 여는데, 세상에나 마상에나 전 남자 친구가 출근복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 번만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하는데 차마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외면하고 말았다. 너무 미성숙했다. 내 마음을 돌려보고자 회사도 내팽개치고 1시간 반을 달려왔을 텐데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미안하다. 복학생 오빠가 앞으로 나서더니
“저와 이야기 나누시죠.”
그랬다. 그 와중에 왜 또 멋있는 거야. 결국 남자들끼리 대화하겠다고 가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인이 잘 이야기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나를 다독이는데 그날 나는 복잡한 마음에 하루 종일 울기만 했던 것 같다. 저녁에는 전 남자 친구가 다시 찾아올까 무서워 후배방에 가서 밤새 울며 민폐를 끼쳤더랬다. 그 이후로 더는 자취방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6개월정도를 매주 한두 번씩 서울 우리 집에 몰래 와서 대문 손잡이에 책과 편지, 선물들을 남겨놓고 갔다. 우연히 한번 아파트 입구에서 그를 보았지만 괜히 무서워 부리나케 도망을 쳐 버렸다. 그 진심을 너무 몰라줬던 것 같아서 그것이 지금도 내내 마음속에 맺혀있다. 사람에 대한 예의에 대한 문제였을까.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분이 떠오른다. 분명 어딘가에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눈물겨운 순애보를 보여주며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아련한 추억으로 장식해 준 그분께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연히라도 절대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해서 그랬을까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이던 복학생 오빠가 시험에서 떨어지며 그 원망이 내게로 살짝 왔던 것 같다. 주색에 빠지면 사람이 뵈는 게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고 했었다. 그땐 그냥 나를 참 많이 좋아하나 보다 이랬는데 생각이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떼어내 들여보내서 공부나 제대로 하라고 닦달을 했었어야 했다. 아휴, 한 치 앞도 못 보는 미련둥이. 그랬다면 지금 회계사 사모님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그 이후로 우린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남들 다 해본다는 캠퍼스 커플도 해봤으니 후회는 없다.
몇 안되지만 남자 친구들과 문제가 생기거나 그냥 술이 마시고 싶거나 하면 늘 주거니 받거니 만나던 초등학교 동창생 남사친이 있었다. 슬퍼할 때는 위로해 주고, 평소에는 고민 상담도 해주는 참 좋은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좋은 친구였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여사친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참 많이도 했었 던 것 같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 친구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만날 때마다 했었다. 그런데 남녀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말이 참인가 보다. 어느 날 갑자기 서로가 이성으로 보이고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사고가 일어나 버렸다. 얼마나 고민을 했었는지 모른다. 남자 친구 생기는 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 만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난 고민을 하다가 혹시나 헤어지게 되더라도 아무도 몰랐으면 싶어 모두에게 비밀로 하기로 약속을 하고 겨우 만남을 시작했다. 초반엔 비밀이어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날 때는 절대 붙어 앉지 않았는데 슬그머니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을 때마다 얼마나 매정하게 쳐냈는지 모른다.
동갑내기에 한 동네에 살고 있던 터라 정말 매일 만났고, 항상 붙어 다녔다. 중국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학원을 갈 때는 강남역까지 전철을 타고 데려다주고, 끝나면 다시 데리러 왔다. 서로의 집도 들락거리며 집에서 만나 밥도 해 먹었다. 우리 집에 올 때는 내가 데려다주고, 돌아서면 다시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 간지러운 짓도 해봤다. 4년 가까이 연애를 했는데 아주 영화를 몇 편을 찍었는지 모른다. 편안한 연애는 아니었다. 불이 화르르 타는 것 같은 연애를 하긴 했다. 그때 그냥 좋은 친구로 남았었다면 어떘을까? 그때 연애를 시작한 우리는 지금은 아내와 남편이 되어 여전히 화르르 화르르 불타오른다. 대부분은 분노와 서운함, 이해할 수 없음으로, 그러나 가뭄에 콩 나듯 연애 시절 같을 때도 있다. 인생은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제발 그만 싸우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