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대만에서
푹푹 찌는 더위가 날 맞이했다. 습한 온도와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한국, 눈이 오던 겨울에 난 여름이 있는 대만으로 향했다. 중국어도, 영어도 그 무엇도 못하는 나는 그저 모든 것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만을 택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뜨거운 태양만 바라볼 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뭘 해야할지 몰라 서성거렸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모든 걸 찾아봤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나보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향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쓰면서 핸드폰을 개통했고 겨우 나가는 곳을 찾았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공항에 나 혼자 남았다는 걸 안 후에야 이곳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는 걸 알았다. 파파고로 간신히 번역해 공항을 빠져나자마자 부모님과 통화하고 나오는 길에 사기를 당할 뻔 했다.
한 아저씨가 걸어와 말을 걸었다.
"어디가? 내가 데려다 줄게. 나 택시 기사야. 짐 이리줘"
미안하지만 못 알아 들었다. 대충 짐작하기론 저런 말인 거 같았다. 긴 세월간 직장 생활하면서 배운 거라곤 눈치보는 일이어서 짜증났는데 또 이럴 땐 유용하게 쓰였다.
"음 미안. 나도 주소를 몰라"
답하고 핸드폰을 들어 미리 한국에서 예약해둔 숙소를 찾았다.옆에서 그걸 지켜본 택시 기사는 자기가 아주 잘 아는 곳이라며 내 짐을 갑자기 들더니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동안 내게 자신이 얼마나 청렴한 기사인지, 얼마나 성실한지에 대해 말하는 듯 했다. 별 반응 없는 내게 "한국에서 왔냐"며 약간의 한국어 실력을 뽐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차에 도착하고 이상함을 느꼈다. 택시 기사인데 왜 '택시'가 적혀있지 않았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며 대충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올려둔 짐을 내렸다. "친구가 곧 나온대"라며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억지 변명이었다. (아마도 황당했을) 택시 기사는 내가 도망가는 걸 지켜봤다. 그러고 문 앞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 난 공항 안으로 다시 들어가 숙소 측에 전화했다. '택시'를 달지 않은 택시가 주변에 많이 있지만 안전을 위해서 '택시'가 달린 택시가 좋다고 하더라.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엔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서 이미 난 사기를 당할 '뻔'한 위기 속에서 벗어나 겨우 살아나는 중이었다. 사실 그 길로 장기가 털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선을 넘은 상상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겨우 다른 택시를 탔고 근 4-5만원이 되는 돈을 내고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관리인이 이 얘길 듣더니 나보고 부자라고 하더라. 그땐 뭔 말인지 몰랐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알았다. 유학생에게 4만원은 체감상 40만원에 달하는 거액이란 사실을. 난 유학 시절 내내 그때 낸 4만원을 두고 아까워했다. 조금만 중국어를 공부하고 왔으면.. 만원에 올 수 있었는데..
여러모로 야속한 하루였지만 날씨는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