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날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누구도 내게 말 걸지 않길, 그냥 조용히 나의 시간과 공간을 지켜주길 간절하게 바라는 날.
가벼운 우울감이 이유 없이 나를 짓누르는 날이다.
어떤 것도 즐겁지 않고, 의욕도 생기지 않고, 먹고 싶지도 않고, 말하는 것도 싫은 날이다.
아이들의 기나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부모들이 해방되는 날인데, 두 달 만에 오전에 혼자 집에 있는 날인데도 마음처럼 기쁘지가 않다. 그냥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아늑한 나의 동굴이 있다면 그곳에 숨어들어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볼륨으로 음악을 듣고 싶다. 책 한 권을 끼고서 읽었다가 잠들었다가 또다시 읽었다가 그런 느릿느릿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어지럽혀진 집과, 골라서 버려야 할 옷장 속 옷들,
물때가 낀 화장실 구석구석, 정리해야 할 수업 자료들.
너무 할 게 많은데 뭐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정리를 못하는 병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엉망인 꼴을 보고 그냥 넘기는 것도 못하는 답답한 내가 싫다.
아마도 내 인생이 애매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인지, 아님 생각보다 치열하게 잘 버텨주고 있어서인지 뭐가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우울하다. 나는 태생이 느린 사람인데, 세상은 모두에게 빨리빨리를 요구하는 것 같아서 그 속도에 맞추기가 어렵다. 나의 속도에 맞춰주는 세상은 없겠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니까, 내가 맞춰야 하니까
그게 힘드니까 우울해
죄는 아니지만 우울해서 우울해
오늘까지만 우울하면 좋겠어
#일기#우울#방학#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