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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어 Dec 01. 2022

싹싹하지 않은 게 죄는 아니잖아  


 배우 윤여정은 어느 인터뷰에서 후배 김고은이 싹싹하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영화 계춘 할망을 찍을 때 김고은이 처음엔 본인을 어려워해서 다가오지 못하다가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슬금슬금 다가와서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다가 친해졌다고 한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니냐는 그녀의 반문싹싹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너무나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밴 싹싹함은 아니지만 서툴게 다가오는 한참 어린 후배의 진심을 헤아려주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싹싹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인상을 남기기 힘들다. 아무리 본질이 괜찮더라도 먼저 나서서 싹싹하게 굴지 않으면 "쟤 뭐야"라는 인식을 남긴다.

 

 사회 초년생 시절 첫 직장에서 나 역시 그런 오해를 받았다. 같은 사무실에 있던,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았던 어느 여선배가 내게 던진 말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교재 연구를 하고 오후에는 외근을 나가야 하는 꽉 찬 하루 일과를, 첫 출근 후 며칠째 이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파묻고 중학생 교재를 연구하는데 나를 스쳐가던 그 선배가 내게

"김 선생은 입에 거미줄 치겠어! 하루 종일 입 한번 안 열어? 사람이 어쩜 그래?"

 말을 던진 것이다.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쏟아졌고 얼굴이 너무나 화끈거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출근하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정도는 주고받았었는데 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인지 몰랐다.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도 없었고 나름 일을 잘하기 위해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일상이었다. 이유 없는 비아냥에 속상하고 눈물이 났다. 이게 사회 초년생이 겪는 인생의 쓴맛인 건가 싶었다.


 교재에서 눈을 떼고 사무실을 둘러보니 젊은 여자 직원들이 내게 모욕감을 준 그 선배 주위에서 싹싹함으로 무장한 웃음들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서는 절대 끄집어낼 수 없는 에티튜드였다. 상하 체계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닌, 모두에게 허용된 '선생님' 호칭을 동등하게 쓰는 학습지 회사에서 왜 나이 많은 선배에게 굽신거려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그곳에서 연차가 가장 오래된 대 선배이며 담당 팀장도 그녀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실세였던 것이다. 내게 던진 그녀의 모진 말에는 '쉽게 일하고 싶으면 나한테 잘 보여라 '라는 속뜻을 품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보다 연장자만 있는 곳에서 싹싹하지 않게 버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마음속에 잘 지내보자는 긍정의 메시지를 가득 품고 있어도 싹싹하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해버린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싹싹함이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튀어나오면 너무나 좋을 테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다. '서툴구나, 어렵구나'라고 헤아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참이 걸려서야 자연스럽게 대화도 오가고 조금씩 친해지며 그 선배와도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녀의 충고는 주변 사람과 친해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나를 공개 저격한 것이다. 


사건 이후싹싹하지 않으면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싹싹함이라도 끌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버릇없는 , 성격 이상한 로 오해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린 누군가가 내게 작정한 듯 불쾌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면, 싹싹하지 않다고 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하게 싹싹한 사람이 나는 불편하다. 기계처럼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싹싹함이 내겐 버겁고 되려 쭈뼛쭈뼛해오는 사람이 더 편하다. 강요된 에티튜드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게 좋다. 




 윤여정처럼 보이는 행동보다 그 속에 갖춰진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당장 눈앞에서 엄청난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만 좋은 시선을 주는 게 아니라, 조금은 서툴고 어리숙하지만 마음만은 진심인 사람에게도 눈길을 주고 기다려 줄줄 아는 사람 말이다. 세상엔 싹싹하진 못해도 마음은 깊은 사람이 많다.

내가 그 선배였다면, 서툰 후배에게 초면에 공개망신을 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힘들고 정신없지? 그래도 주변 사람과 얘기도 하고 어울리도록 해봐. 그럼 조금은 덜 힘들 거야.' 그 정도 조언을 해줬다면 그 사람을 아직도 상처 남긴 사람으로 기억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싹싹하지 않은 자여


괜찮다

시간은 걸리지만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싹싹함#인간관계#진심#사람#윤여정#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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