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로 습기가 온 동네를 꽉 메웠다가 잠깐씩 해가 쨍하니 비치는 순간이었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 걷기 운동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반바지와 난방을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무작정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쨍한 햇볕에 밖에 나온 것을 후회하며 더위를 피할 곳을 찾았다. 마침 배도고파서 시원한 무언가로 점심을 해결하고 싶다. 학원가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위치한 손칼국수집에서 100% 국내산 콩으로 만든 냉콩국수가 여름 메뉴로 선을 보이고 있었다. 홀린 듯이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콩국수를 주문했다.
고소하고 진한 콩물에 부드러운 면이 그득 담긴 시원한 콩국수가 나왔다. 사장님의 말처럼 소금물을 두어 번 두르니 간이 딱 맞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주위를 돌아보니 테이블엔 흰머리 히끗한 어르신 네 분이 콩국수를 드시고 있다. 예전엔 혼자 콩국수를 먹는 건 생각도 못해봤는데 이제 그게 가능한 나이가 된 것 같다. 마음속에서 테이블에 있는 그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어른이 된 것 같은 묘한 우쭐거림이 솟아났다.
콩국수라는 음식을 처음 맛본건 스무 살? 스물한 살? 그쯤이었다. 오빠가 공시생으로 대구에서 혼자 자취하던 시절. 엄마는 대구에 가서 오빠와 얘기도 나누고 같이 밥이라도 먹고 오라며 나를 보냈다. 우리는 더위에 지쳐 먹을 곳을 찾다가 칼국수와 파전을 파는 식당에 들어갔다. 무슨 호기심인지 콩국수를 주문했고 생애 처음으로 기이한 음식을 접했다. 내게 그날의 콩국수는 그 어떤 매력도 찾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같이 주문한 파전으로 배를 채웠다. 오빠의 자취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둘이서만 밖에서 밥을 먹은 게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벌써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13번째의 여름이다.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7월의 끝자락에 시간이 닿으면 그의 기일도 온다. 이제 나는, 내 기억 속에 30대 청춘으로만 존재하는 그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44살의 아줌마가 되었다.
그때 우린 어떤 미래를 그렸을까
처음으로 콩국수를 먹던 어린 21살의 나와 25살의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생을
조금만 더 여유롭게 생각했다면
조금만 용기 내어 힘들다고 소리 내고 울고 외쳤다면
...
지금쯤 44살의 동생과 48살의 오빠는 식당에서 마주 앉아 콩국수를 먹으며 20대의 우리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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