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한테도 한 번 안 맞아본 귀한 자식

맞고 자랐으면 일단 안 귀한 자식인 걸까

by 이담

학창 시절, 95~05년대 중고등학교는 선생님이 왕이었던 시절을 조금 벗어나 있었다. 일명 촌지라는 문화가 점차 사라지던 때이기는 하지만 선생님들의 권위는 여전했다. 그 시절 중고등학생들은 지각을 하면 쪼그려 뛰기로 운동장을 돌았고, 숙제를 안 해오면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맞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꽤나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고려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에나 예외는 있듯이 학생들 사이에 유명한 호랑이 선생님들은 있었다.

그런 호랑이 선생님 앞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도 긴장을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호랑이선생님은 나에게 무슨 교시가 끝나면 반장한테 교무실로 오라고 전하라 하셨다. 얼렁뚱땅 어설픈 나는 그 전달사항을 잊었고, 반장이 오지 않자 호랑이 선생님의 화를 돋우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불려 가 고개를 숙이고 흥분한 선생님의 호통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 화가 난 그 선생님은 가볍게 발길질을 했는데, 선생님이 신고 있던 슬리퍼가 내 얼굴에 날아왔다. 선생님은 의도치 않은 상황에 당황해 "잽싸게 피해야지 그걸 맞고 있냐"하더니 우리를 해산시켰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슬리퍼로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것도 창피했지만 얼굴이 빨갛게 부어올라 '나 맞았음' 하고 도장을 찍어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의 원인이 전달사항을 잊어버린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인 걸까. 자책했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친구들은 나에게 모여들어 '너무했다'며 위로했다. 그러다가 어떤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우리 엄마아빠한테도 안 맞아봤는데" 하는 식의 말이었다. 그 시절, 그 나잇대 정도면 맞고 자라지 않은 것이 보편적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내 기억은 드문드문 너덜거리는 조각 수준이기에 당연스레 나의 기억이 아닌, 엄마의 기억이다.

엄마는 신혼시절부터 시가와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아빠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가족들도 그러했고 돈 문제는 가족들을 날카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꼭 전날 모여 명절 음식을 하고, 제사를 드렸던 탓에, 엄마는 명절이면 억지로 우리를 데려가 인사시키고 음식 준비를 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마찰 탓에 속으로는 그 상황을 불편해했다. 게다가 우리가 친척집에 가면 각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모여 모인 아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는데, 큰 집에서는 그렇게 모인 아이들에게 과자를 먹으라고 권했지만 알게 모르게 눈치도 주곤 했었나 보다. 엄마는 그렇게 과자를 챙겨주면서도 불평하던 친척 어른의 태도가 불편했다. 그래서 나와 오빠에게 과자를 권해주시더라도 절대 받아먹지 말라고 일렀다.

그런데, 시장 초입부터 돌아 나올 때까지 보이는 모든 걸 갖고 싶고 먹고 싶던 내가 문제였다. 나는 친척어른이 과자를 고르라고 권했을 때는 안 먹겠다고 해놓고 어른들이 없을 때 몰래 과자를 훔쳤던 거였다. 그리고 그걸 어른들에게 들켰다.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에 엄마는 수치심을 느꼈을 테다. 엄마는 나를 끌고 사람이 없는 둑 길로 데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렸다고 했다. 울고 불며 죄송하다는 나를 엄마는 이성을 잃고 때렸고 그러다 나는 바지에 오줌을 지렸단다. 아마 엄마는 그때야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엄마의 말로 그때 내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더 의기소침해졌다. 엄마를 속상하게 한 것도 모자라, 도둑질까지 한 못된 아이였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귀하게 자란 자식이라기보다는 맞고 자란 자식에 가깝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다섯 살부터 여러 해까지 여전히 형편없었고 몸으로 마음으로 맞고 자랐다. 엄마나 선생님도 나를 때렸지만 나 자신도 나를 때렸다.

여섯 살과 열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지릴 때까지 맞았던 다섯 살의 내가 안쓰럽다. 다섯 살이 눈앞에 과자를 두고 얼마나 먹고 싶었을 까 싶다. 다른 아이들은 먹는데 나는 왜 안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엄마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고, 몰래 먹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모든 일의 원인을 나로 돌리지 않는다. 모든 불행과 불운에 대해 나를 책망하지 않기로 한다. 늘 엄마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 전에 '금쪽같은 내 새끼' 영상을 봤다. 영상 속 아이는 악귀에 들린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내가 죽으면 되잖아요. 죽으면 끝나는 거잖아요. 왜 그러는 건데요." 그 아이는 친구들의,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불안해하고 격분했다. 오은영 선생님은 아이가 그 모든 불편한 순간을 '거절'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말과 행동이 익숙했다. 그 아이는 나와 비슷했다.

나는 어떤 것도 쉽사리 권하지 못한다. '아니'라는 답이 거절같이 느껴진다. 친구든 연인이든 나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면, 떠날 것 같다는 생각도 늘 했다.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견을 말하기보단 다른 친구의 의견을 따른다. 아주 최근 까지도 나는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들끼리만 모인 자리에서도 누군가 나를 부르며 입을 떼면,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지 덜컥 불안한 감정이 들었었다. 현재는 많이 편안해졌지만 말이다. 나를 변화시킨 건 소중한 친구들과 남편, 아이들의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이었다.

어쨌든 곧 마흔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나보다 여덟 살 금쪽이가 더 나았다. 금쪽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금쪽이는 엄마에게 사랑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게 나를 낫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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