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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Mar 06. 2020

너의 의미

나에게 부치는 편지

너는 지금 학교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
대학생의 모습으로 앞치마를 두른 채 말이야.
그림을 살짝 보니 숲에서 나무 덤불 같은 초록색 연기가 피어나고 있어. 어떤 의미일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리는 모습을 보니 재밌어 보여.

대학교 첫 수업, 강의실에서의 네 모습을 기억해. 너는 수줍은 듯, 설렌 듯 앉아있어. 고등학생 티를 벗으려 화장도 하고, 굽 높은 구두도 신었네.
강사는 여기서 작가 할 사람 누구냐고 물어. 넌 거기에 쭈뼛쭈뼛 손을 들지. 마치 그게 선언인 듯, 약속인 듯 네가 2학년이 되면 없는 공간에 파티션을 놓아 작업실을 마련해. 너만의 공간이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그 공간. 그곳에서 작업도 하고 친구들과 모여 앉아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대학생이야. 어른 노릇을 해대는 모습보다 나이다운 즐거움으로 재잘대는 너를 바라보는 건 참 흐뭇한 일이야.

너는 세상을 좀 더 많이 경험하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해. 수업시간에 예술을 하려면 사랑과 여행을 해봐야 한다는 말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건지, 너는 남자 친구도 사귀고 여행도 다녀.

그런 하루하루 속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적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읽으며 씨름하기도 하지.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재능이 있는 건지 걱정에 사무치기도 하고. 그래도 창작이 자유를 줄 거라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할 거라고 위로를 해.
끝내 너는 그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네가 32살이 된 어느 날 “모든 기억을 버리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만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그때라고 대답해. 또 먼 미래에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길 바라면서.

너는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어. 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게 됐고, 슬픔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위로해줬지. 이것은 내가 너를, 과거의 나를 인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훗날 세월이 흐른 뒤에 힘든 순간이 올 거야.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꿔보겠다고 부질없는 노력도 많이 했지.
너는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게 지는 것인 줄로만 알고 그 인정이 또 다른 긍정이 될 수 있음을 그때는 몰랐어. 그 아집스런 때가 응어리져 너도 모르는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지 가끔 사람들이 네 얼굴에서 그늘을 본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져. 그래서 나는 당시에 사랑해주지 못했던 너에게 집중하고 세부적인 것 하나 놓치지 않을 작정이야.

32살 이맘때가 되면 소중히 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 그렇게 사람 때문에 너 자신마저 싫어졌을 때도 결국 너를 보듬어 준 것도 사람이더라. 특히 올 한 해는 시작과 끝이 이렇게 달랐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야. 너는 이제야 예술을 하려면 사랑과 여행을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돼. 그것들로 인해 너 자신도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되면서 말이야.

그렇게 너는 4학년을 맞이하고 졸업전시 준비를 해. 흰 캔버스 앞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어. 붓터치 하나하나에 신중하고 교수님, 동기들과 작업에 대해 사뭇 진지한 이야기도 해. 비판적인 이야기에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 작업이 좋다는 이야기에 기분 좋은 표정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

그 모습 하나가 내가 길을 헤맬 때마다 희미한 빛이 되어 주었어. 너를 잃기 싫어서 매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의무감일까, 아니면 소명감일까. 그럴 때마다 생각해. 네가 나에게 갖는 의미와 가질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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