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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Mar 07. 2020

동그라미

둥글게 그려진 모양이나 형태

유치원, 초등학교 시기의 아이들이 가는 학원에는 규칙 같은 것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발레, 피아노, 미술학원을 가고 남자아이는 태권도, 검도, 피아노, 미술학원을 갔다. 예체능을 통해 자식들의 창의성, 심신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부모님의 바람이었다. 나도 그 규칙에 벗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 채 엄마가 가라는 대로 언니와 함께 수영, 발레, 피아노, 미술학원을 다녔다. 발레는 어느 순간 안 다니고 있었고 피아노는 내 성향에 안 맞았는지 연습실에 들어가면 적당히 시간이 지났을 때쯤, 연습 횟수를 체크하는 피아노 건반 위 볼펜을 한 칸씩 옆으로 옮겼다.

내가 다닌 미술학원은 가정집의 거실에 큰 상을 놓고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리는 미술교습소 같은 곳이었다. 여러 학원을 전전하고 나서야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즐겁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이면 동물, 만화 캐릭터면 만화 캐릭터 등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하는 칭찬을 듣는 것이 좋았다.

미술학원에 가면 처음 하는 것은 선 연습이다.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 취급받는 게 싫은 것처럼 미술학원에서도 초보자 취급받는 게 싫었다. 선긋기 연습은 시시하다며 나도 빨리 다른 상급 학생들처럼 원뿔, 직육면체, 삼각뿔 모양의 석고상을 그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내가 조급한 마음에 선을 대충 그어 보이면 그다음 세로로, 그다음 대각선으로 그리라며 무심히 툭툭 대답하셨다. 처음에는 분했지만 제 풀에 꺾여 묵묵히 선을 그어갔다.

선 연습은 가로 선긋기, 그 위에 세로선 긋기, 그리고 대각선 긋기, 나선형 선 긋기 등 하얀 종이가 깜지가 될 때까지 긋고, 그 위에 긋고, 그 위에 또 그었다. 처음에는 연필 잡는 방식이 글씨 쓸 때와 같지 않고 똑바르게 그리려는 마음에 삐뚤빼뚤한 선이 그어진다. 그러다 연필 잡는 방식이 익숙해지면 어느새 손에 들어간 긴장이 풀리고 시원하고 곧은 선이 그려진다.

그다음 코스는 동그라미. 하나의 동그라미가 동그랗게 될 때까지 여러 선을 겹쳐가며 그린다. 하나를 그리면 그 근처에 크기가 다른 동그라미를 겹쳐 그린다. 타원은 점점 어느 원둘레에서 재도 원지름이 동일한 원이 된다.
그럼 이제 그림 그릴 준비가 된 것이다.



1995년 즈음
지금은 네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시간이야. 지금 와서야 초등학교 교실을 보니 이렇게 작았었나 싶어. 그때는 교실도 선생님도 운동장도 참 커 보였는데 말이야. 교실 바닥의 얇고 긴 나무 널들은 학생들이 청소시간에 열심히 닦았는지 윤이 나네. 거기에는 네 고사리 같은 손길도 묻어있겠지. 오늘 미술시간에는 무엇을 할까? 선생님께서 나눠준 에이포 용지에는 가로 세로 3개씩 9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어. 그 동그라미를 보고 연상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번 미술시간의 주제야.

처음에는 해를 그리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다른 그림을 그리려고 해. 다른 친구들이 생각 못하는 게 무엇이 있을까, 동그라미는 무엇과 닮았을까, 생각을 하며 너는 눈을 데굴데굴 굴려. 친구들이 훔쳐볼까 봐 손등으로 그림을 가리기도 하면서 1개에서 2개, 2개에서 3개로 동그라미를 채워나가. 마지막 9개째가 되면 고갈된 아이디어에 네가 교실에서 볼 수 있는 구석구석이라고는 다 훑어봐.
선으로만 된 동일한 원들이 이제는 네 생각을 담은 색깔과 선으로 달라져 있네.

선생님은 돌아다니시면서 잘 된 그림들을 고르고 계셔. 넌 네 그림이 선택되길 바라면서도 내심 모르는 척 마음을 숨겨. 선생님께서 너보고 발표하라고 했을 때는 발표 차례를 기다리며 내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나 이렇게 창의적이라고, 잘 그린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표정에 가득해. 감추려 해도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 너의 모습은 그때도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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